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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을 너무 오래 지연하였기 때문에 배설하고자 한다. 그때 우리가 꾼 꿈은 무엇의 꿈이었을까? 꿈이란 어떤 식으로 정의할 수 있는 세계란 말인가. 꿈이란 형식만 정해져 있고, 내용은 변화무쌍하다. 순간적으로 고정해서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떠어떠한 꿈을 가졌다고 말할 때 그것은 꿈의 사진을 찍은 것과 같다. 실제 꿈이 가지고 있는 내용은 그 순간에 변화하고 있다. 배설을 통해 우리는 일단 쓰고자 했다.지면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개인 블로그여서는 안 되는 거였나. 그나마 쓸만한 티스토리 블로그는 연결성이 낮은 까닭에 개인 블로그로는 고독했을 것이다. 대화가 안 되면 대화의 시도라도 되어야 하는데 개인 블로그는 독백이고 잘해야 방백이다. 익명의 독자도 좋지만,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글을 읽어준다는 것이.. 더보기
새해라면 절필 새해라면 절필 새해에는 이 언어를 버리고 싶다고 너는 막연히 생각했었다.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네 본명조차 낯설어진 요즈음에도 너는 모국어로 연애를, 식사를, 모호한 감정들을 인지한다. 모국어를 잊으면 다소 건조한 연애쯤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C는 네게 유화 도구를 한 벌 -- 나중에 C의 화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C가 난데없이 메시지를 보내 유화를 그리려면 뭐가 필요하냐고 물었었단다 ("붓이랑 물감 말고 또 뭐가 필요한가? 하길래 내가 그랬어요, 자, 종이랑 펜을 준비하고, 내가 말하는 것들을 모조리 받아 적어.) -- 선물해 주었다. 미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너는 무턱대고 페인팅나이프를 하나 집어들어, 젯소를 바른 캔버스에 울트라마린 물감을 두텁게 얹었다. 캔버스.. 더보기
말과 행동 말의 뜨거운 함정. 성탄절이다. 부대의 밤에는 성탄이 없다. 금요일 퇴근하면서 나는 그저 좋은 주말 되시라는 말을 했다. 성탄절은 대체로 잊혀진 분위기다. 물론 종교 시설은 다르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미사에 참여하여 인간의 미천함에 대해 생각했다. 신부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수녀님이 잠자리에 들려 하는데 새가 창문에 와 부딪혀 떨어졌다. 가서 도와주려는 마음에 손을 가까이 하니 도망치더란 것이다. 이 손길이 새에게는 더욱 무서운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내가 새였으면 도와줄 수 있었을텐데, 아쉬워하면서 그냥 돌아왔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리하여 헐벗은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 위에 누워야 했다.(구유를 잘 모르는 우리는 낭만화하겠지만.. 더보기
ps. 눈의 물이 눈물인지 눈물인지는 도무지 모른답디다, 우리말의 장모음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데요 추운 날이면 여지없이 품고 안고 어루만지고 비루먹은 개처럼 피가 나도록 핥을 기억이 있다는 것 참 다행 아녜요 내겐 그래요 그렇네요 시간의 기념비처럼, 얼어붙은 돌에 혀를 갖다 대어 떼어내려면 혀의 절반이 떨어져 나가는 시간들처럼 당신이 그립지 않아도 그 시간들이 아름다워요. 당신과 나는 찬 혀에 섭씨 칠십오 도의 단팥을 가져다대어 화상을 입고는 했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성에는 겨울의 곰팡이랍니다 나는 곰팡이 낀 몸을 양 팔로 감싸안고 박제가 되어요 일, 이, 삼, 사, 오. 어쩌면 육 또 어쩌면 칠, 추억이 얼어붙는 불 같은 시간을 당신께 소포로 보내요, 만져지나요 점도도 점액도 없는 결정체로 보아하니 .. 더보기
오픈 유어 --- 오픈 유어 --- 열쇠 돌아가는 기척에 고양이가 벌써 방문 밖으로 뛰쳐나간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너는 깜짝 잠에서 깨어난다. - Hey.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나 작업을 할 생각에 컨택트렌즈도 빼지 않고 잠이 들어 시야가 침침하다. 혀도 뇌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너는 영문을 모른 채 흐릿한 실루엣에 초점을 맞추려 애쓴다. 스탠드 불빛에 찬 겨울밤 냄새과 네가 잘 아는 모직 코트 냄새가 몽롱히 섞여 온다. 그림자가 익숙한 몸짓으로 옷을 슥슥 벗어내고 네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춘다. - 아, 나 오늘 여기서 잘 거야. Q가 친구들을 데려와서 파티를 하는 중인데 시끄러워서 잠이 들 수가 없어서. 깨워서 미안해. 금방 양치하고 올게.C가 화장실에 간 사이 너는 꾸역꾸역 몸을 .. 더보기
우리 헤어지는 연습 우리 헤어지는 연습 우리 언젠가 헤어져야 하잖아요. 헤어지는 연습을 해 봐요. 요즘 - 너는 이상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 이사할 일이 두려워 살림살이 늘리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던 사람이 삶의 부속물을 모아들인다. 중간 크기의, 모교 엠블럼이 찍혀 있는, 머그 하나에 커피도 라면도 오트밀도 케이크도 담아 먹던 네가 종이학 문양이 아로새겨진 예쁜 찻잔 세트에 눈길을 주고 세일 기간을 기다리고, 가구며 주방기구를 사들인다.또 어딘가로 떠나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이것들을 짊어질지 내버릴지 너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는 불완전한 육체를 보완하기 위한 연장[延長]이라 보아도 좋다. 많은 음식을 몸에 한꺼번에 저장할 수 없기에 외장-위장인 그릇을 만들었고, 포식동물의 송.. 더보기
혀로 할 수 있는 모든 것 #1 인생 보르시[борщ] #1 인생 보르시 [борщ] 0.보르시[borscht, borshch, борщ]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1. 영어에서 그대로 음역을 하다 보니 우리말이나 일어 문학에서는 '보르시치'라고 적는 경우도 있다. 너는 그 이름을 라는 일본 소설에서 처음 접한다. 섹스는 곧 죄이자 타락이자, 영혼의 사랑에서 벗어나는 불륜이라는 열다섯 살 너의 속단을 부수어 준 것이 그 다소 허섭스레기같은 책인데, 아무튼 그 소설에서 시한부 -- 당연히 암 환자인 -- 여주인공 요코는 남프랑스의 니스까지 남자친구 류지와 여행을 떠난다. 갖은 치료로 이미 식욕이 없어진 요코가 니스까지 가서 꼭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러시아 양배추 수프인 '보르시치.' 러시아인 택시 운전사의 도움을 받아 류지는 보르시치를 끓여 .. 더보기
연애의 정서와 연애의 언어 연애의 정서와 연애의 언어 오늘은 하루 종일 네가 보고 싶었어, K -- 그런 점에서 여느 날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고 말이지. 네가 어젯밤 썼던 베개를 베고 있으니까 네 냄새가 난다. 보고 싶어. 요즘 제법 인기가 많은 것 같은 새 블로그 포털에 직접 요리해 쓰는 음식 에세이를 연재해 볼까 하다가 -- 첫 에세이는 아마도 보르시 -- 보르시는 너의 해장 수프이기도 해서, 너의 냉장고에는 항상 자줏빛 수프가 담긴 큰 유리병이 하나씩 놓여 있다 -- 의 사진과 역사와 조리법과 내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 전 애인이 역시 음식을 컨셉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만둔다. 보류, 라 해도 좋다. 그에게도 그의 공간을 주어야 할 것이다. 대신 너는 하와이의 코나 맥주나 -- 이제 으레 C는, 너와 .. 더보기
이런 날에는 들까부르고 싶다 비가 밤 종일을 새워서 내리다가 그친 날에는 버스를 타고 싶다. 버스를 타고 죽어라 멀미를 하며 버스로 갈 수 있는 길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 내리고 싶어도 내리지 못하고 포장되지 않아 나를 위 아래로 흔들어대는 길의 감촉을 전정기관으로 느껴보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하고 싶은 것들 투성이,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싶은 것들. 하늘 한 구석에 스크린을 세워 두듯이 파란 하늘이 잔존하다가, 마침내 온 누리를 뒤덮은 시간이면 아직 따사로운 햇볕을 올해의 마지막처럼 즐긴다. 여름 내내 사용되어 다 낡아 떨어진 볕이 그래도 따끔하다. 아직은 살아있거니, 한다. 왼쪽 뺨이 뜨거운 것은, 커피를 마셔서라고 핑계대어 본다. 산은 구성진 노랫가락처럼 흘러가다가, 모이기도 하고, 다시 흩어져서 제 갈길 가.. 더보기
청명 청명 날이 좋다. 휴대전화 시계 대신 -- 시간대를 숱하게 넘어다닌 탓인지 언제부턴가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한 핸드폰 시계는 오 분, 칠 분, 십 분, 종내는 십구 분이나 빠른 시간을 안내하게 되었다 --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열두 시 오십오 분.C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약속장소 앞에서 기다리는 대신 C네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가방도 모처럼 -- 소설책 한 권을 복사해 제본한 종이 한 묶음을 제외하면 -- Eve de ses décombres, Eve out of Her Ruins -- 가볍다. 볕이 좋다.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바람도 햇살도 투명하다. 벽난로가 있는 집으로 이사했으니 긴 겨울도 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기대한다. 삶의 틀은 잡혀 간다. 고기를 뺀 레시피로 보르시를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