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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 블루스와 미역국 - 연애를 마치고, 시작하며 집밥 블루스와 미역국- 연애를 마치고, 시작하며 방에 한 사람 몫의 물건이 더 있는 걸 빼면 삶이 대체로 단출하다. 잘 하면 올 시월에는 한국어라곤 한 마디도 모르는 남자가 미국 미역으로 쇠고기 없이 끓인 미역국을 먹게 될 것 같다. 기분이 묘하다. 우리 집 식구들은 원래 요리 잘 안 한다고, 엄마 생일과 내 생일이 시월에 일 주일 간격이라 미역국을 끓여서 한 달을 먹는다고, 그런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니 P는 핸드폰을 꺼내 '한국 해초 수프'를 검색한다. 이걸 아예 버스데이 수프라고 부르나보네, 하면서 레시피를 쭉 훑어보더니 아마 끓일 수 있을 것 같단다. 내 미역국은 그렇게 버스데이 수프가 됐다. 미역국에 찰밥을 말아 불려 먹고 싶어진다. 딴에는 '집밥'을 먹고 있기는 하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연애.. 더보기
메밀꽃과 세르비안 쇼: 봉평에서 세계문학 생각하기 메밀꽃과 세르비안 쇼: 봉평에서 세계문학 생각하기 “세르비안 쇼는 노래와 춤을 밑천 삼아 이곳으로 흘러든 가무단으로 반드시 세르비아 사람들로만 조직된 것이 아니라 10여 명 단원이 백계 노인을 주로 하여 폴란드, 유태猶太, 헝가리, 체코 등 각기 국적을 달리하고 가운데에는 유라시안도 끼어 있는 마치 조그만 인종의 전람회를 이룬 듯한 혼잡한 단체였다. 그들의 노래와 춤이 그닷 놀라운 것은 못 되었으나 그들의 색다른 자태가 낯선 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족했고 우리의 관주館主가 상당히 비싼 조건으로 그들과 선뜻 계약을 맺은 것도 그 점을 노려서였다. 한 시간가량씩 하루 두 번씩 출연에 대한 사례가 500원, 엿새 동안에 3,000원이라는 것이 그들을 맞이하는 거의 최고의 대접이었으며 생각건대 만주 등지.. 더보기
빈집 서울을 떠나고 싶어져 비행기를 앞당길 궁리를 한참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헛일이다.열대야로 새벽 한두 시가 되어도 잠들기가 어렵다. 때마침 시작된 생리에 온몸이 꿉꿉하고 저리다. 생명을 내보낸 도시가 말라붙은 고치처럼 찢어진 귀퉁이로부터 서걱이며 부서져 나간다. 나는 천장을 보며 너와 함께 보았던, 너와 함께 보지 못한, 너와 함께 볼 수 있었을, 그리고 너와 함께 보지 못했을 영화들을 셈해 보았다. 집은 사람이 떠난다고 함께 떠날 수 없다고, 네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고, 너는 말했다. 나는 왜 우리는 집과 여행자의 관계가 되어야만 했는지를 생각했다. 네 어깨와 가슴팍에 눈믈이 그렁하게 맺힌 속눈썹을 닦고 싶었다. 나는 울기를 잘 했고 너는 울리기도 달래기도 잘 했다. 네가 두고 간 책 .. 더보기
리뷰: 가스파 노에의 <러브> (2015) 에로티카를 평함에 있어서도 내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에로티카는, A) 최대한 성적인 컨텐츠를 가장 노골적으로, 가장 미학적으로 표현하되, B) 각 장면이 관객으로 하여금 자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영화가 끝난 후 오히려 인생에 대한 절망감으로 자위 욕구를 느끼게끔 한다면 보너스 포인트.) 그런 의미에서 가스파 노에의 는 멋진 에로티카다. 위의 두 기준을 설명하면 으레 돌아오는 질문은 A는 그렇다 쳐도 왜 B를 고집하는가, 인데, 에로티카는 포르노그라피와는 다르다. 포르노그라피가 소모품이라면 -- 저는 소장하는데요? 라고 또 으레 반문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모성은 음식물의 소모와도 같은 것이다. 짜장면을 일주일에 한 번씩 시켜 먹는 것과, 이 집의 .. 더보기
가질 수 없는 것들의 박물관 1 야한 연애소설을 쓰기는 쓰는 거냐고들 하시길래. 뭐라도 조금씩 쓰고 있음을 증빙하는 자료로 올립니다. 가질 수 없는 것들의 박물관#1 일랴 이삿짐이 가득한 방에서 여자는 언제나처럼 남자를 맞았다. 재회가 영 없을 이별도 있다.그래서 남자는 어느 때보다도 길고 잠잠하게 여자의 성기에 입을 맞췄고, 여자는 눈앞에 오가는 남자의 얼굴을 피하지 않은 채 남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지막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입과 입이 만나 체액을 나누고, 입과 성기가 만난다. 남자는 늘 여자를 갖기 전 여자의 입을 먼저 원했다.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여자의 기도가 막혀오기까지 여자의 입 속으로 성기를 밀어넣었다. 그렇게 잠시 들숨과 날숨이 멈추는 순간이면 여자는 늘 어금니 안쪽을 눌러 오는 남자의 성기에 포진해 있.. 더보기
생일날 오늘은 내 생일이다. 우리는 '힘들어 죽겠다'같은 말들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그게 정말 죽고싶다는 얘기는 아니기에 태어났고 살아있음을 기념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축하와 사랑의 말들을 전해받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날이다. 오늘도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웃음과 좋은 시간들이 쌓인 말을 건네주었고, 엄마 아빠와 오랜만에 길게 이야기를 나누며 이제는 내가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같은 이야기를 함께 했다. 나는 작년 생일 이후 일년 동안 어떤 한 해보다도 생일을 자주 떠올렸고, 생일을 떠올리며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것같다.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기쁘게 느끼고 감사하는 날이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죽음의 구멍이 되었다. 삶은 언제나 죽음과 손잡고 가는 것이라고 .. 더보기
가벼움과 무거움과 말과 돌 가벼움과 무거움과 말과 돌 나는 너에게 비트와 바이트로 글을 쓰고 있다. 칼비노는 1985년, 하버드에서의 강연을 앞두고 사망했으며, 그가 보았던 가벼움의 정수 -- 해저를 지나는 전화선 -- 는 지금 우리 삶에서는 오히려 이미 무거운 침전물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의 파편과 자음과 모음이 -- 0과 1과 미세하고 균일한 파동 여럿으로 쪼개진 음성들이 -- 내 주변의 허공을 날고 있다. 요즘 이탈로 칼비노라는 작가에 푹 빠져 있다. 아마 영 불가능한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 내가 언어 여러 개를 실제로 배워 내서 구사해야 하는 학생이 아니라, 그냥 책 좋아하는 애서가였다면 --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는 책을 어떻게든 구해, 내 알량한 불어와 서반아어에서 라틴어 어원을 끄.. 더보기
계절적 대안적 사랑 (친구 남자친구 분들 중에는 제가 남자친구 얘기 쓰는 걸 부러워하시는 분도 있던데. 제 남자친구는 참고로 제가 자기 얘기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닌가?) 원고번호 2 작희계절적 대안적 사랑 아마 현실적으로 성취가 불가능한 소원이겠지만, 나는 떠날 때 신발을 좀 선물 받고 싶다. 신고 오래 걸어도 편안한 신발. 광야를 오래 걸어도 해지지 않고, 닳지 않을 신발. 물소 가죽 신발. 투박한 신발. 여자가 떠날 때 신발을 선물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아마 -- 떠났지만 -- 그 사람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걷는 길이 다르더라도 너의 꿈을 응원한다는 뜻이니까. 내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예쁘고 불편한 신발을 줄 이유는 없다. 굳이 준다고 하면 그것은 모욕의 한 방법일 것이다. 신고 오래 걸을.. 더보기
이 모든 것이 또한 실패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이 또한 실패한다 해도 이전에, "만일 이 모든 것이 실패한다 해도, 내게는 공립도서관이 있다"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사람도 동물과 같아서 이상적인 서식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라가 될 수도 있고, 도시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직장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어느 장소에 가든 생활방식이 크게 변하지 않고, 도시와 금방 사랑에 빠지는 편이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는 서식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요즘 느끼는 것은 내 서식지라는 게 이 생활방식 자체라는 사실이다. 좋은 도서관이 있고, 글을 쓸 수 있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유년기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는 내 서식지이고, 그것이 없어진다 했을 때에 내가 멸종하지 않을 거란 자신이 없다. .. 더보기
타고르와 셸리와 형이상학 오늘 모 선배가, 우리는 왜 사귀게 되었냐고 해서, 그 답을 집에 오는 길에 곱씹어 보다가 몇 자 적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연애쯤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일단 그런 질문을 들으면 나는 왜 당신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것부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당신과 나도 답을 모릅니다.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하여는 임의의 답이 정답이 되겠지요. 고대 사회의 신화만 보더라도 가장 신빙성 있는 '구라'가 모든 것을 설명해 내지 않던가요. 그래서 내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든 양상의 본질인 우연이라고 하는 물리법칙과 그 통속성에서 그나마 건져낼 만한 것이 -- 그 자신은 우연의 산물이라 해도, 보는 이로 하여금 필연을 믿게 할 만큼 사랑스러운 것이 -- 나와 당신의 실존이 시공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