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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리뷰: 가스파 노에의 <러브> (2015)

에로티카를 평함에 있어서도 내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에로티카는, A) 최대한 성적인 컨텐츠를 가장 노골적으로, 가장 미학적으로 표현하되, B) 각 장면이 관객으로 하여금 자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영화가 끝난 후 오히려 인생에 대한 절망감으로 자위 욕구를 느끼게끔 한다면 보너스 포인트.) 그런 의미에서 가스파 노에의 <러브>는 멋진 에로티카다.

위의 두 기준을 설명하면 으레 돌아오는 질문은 A는 그렇다 쳐도 왜 B를 고집하는가, 인데, 에로티카는 포르노그라피와는 다르다. 포르노그라피가 소모품이라면 -- 저는 소장하는데요? 라고 또 으레 반문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모성은 음식물의 소모와도 같은 것이다. 짜장면을 일주일에 한 번씩 시켜 먹는 것과, 이 집의 짜장면은 한 번을 먹어도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만큼 어떠한 경지에 올라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물론 AV 배우나 감독 중에서도 그러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즉 예술적 소장 가치가 있는, 에로티카의 범주에 접어든 야동도 있을 것이며,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두고 그에 맞추어 포르노를 감별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 에로티카는 소장품이 될 수 있으며, 성적 자극 이외에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 포르노가 몰입을 유도한다면 -- 그래서 pov라는 서브장르가 있지 않은가! -- 에로티카는 몰입과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остранение)의 두 기법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사유와 고찰의 공간을 연다. 외설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 내면의 욕망과 허망 두 가지를 다 조명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에로티카의 이상[理想]이다. 플라토닉 아이디어인 만큼 그런 순수한 에로티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외설은 포르노적 요소와 에로티카적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

(부연한다. 중학교에 다닐 때 읽었던, 사실 별 볼 일 없는 일본 소설 중 딱 하나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에로잡지의 기능에 대한 이야기다. '에로잡지,' 즉 포르노는 '서지 않으면,' 그래서 '마스터베이션' -- 아마 가타카나로 원문에는 쓰여 있었지 않았나 싶은데 -- 이후 미련 없이 버려지지 않으면, 포르노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즉, 포르노를 보면서 -- 보는 도중에! 현타와는 다르다 -- 인생과 예술과 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하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야한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라고 자부하는데, <러브>는 좀 특별하다. 3D 영화의 특성상, 감독이 성적인 소재를 극단적으로 다루고자 한다면 극단적인 포르노와 극단적인 에로티카, 두 가지의 선택지가 모두 가능하다. <러브>가 어떤 영화인지 간단히 소개하자면:

0) 러브는 깐느 영화제에서 두 번째로 상영된 3D 에로티카(에로 영화?)다. 첫 번째는 3D 카마수트라였다.

1) 두 시간 반 동안 본 정사 장면이 평생 본 모든 영화에서 본 것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기분이다.

2) 사정 장면까지 그렇게 클로즈업해서, 그렇게 많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영화는 처음이다. 관객을 향한 손가락이 난데없이 페니스로 변모해, 포피를 제거하지 않아
지렁이의 두부[頭部]처럼 말캉한 성기 끝부분이, 두 개의 동심원을 이룬 채 화면 밖으로 솟아오르는 것만 같은 (!) 장면과, 카메라를 향해 -- 즉 관객 쪽을 향해 -- 흰 액체가 연거푸 솟구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 (남자 성기의 형태나 각도 따위를 성행위 각 단계에서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거나, 항구적인 현자타임 상태에 처해 있어 별로 그런 것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현자타임이 종결된 이후 시청하기를 권한다.)

3) 정사 장면을 포함해 모든 씬의 구도와 배치, 색감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하나하나 액자에 넣어 응접실 커피 테이블에 세워 두고 싶다.

[4) 한글 자막 번역이 다소 유치하다. fuck (fuck up) 이라는 말의 두 가지 뜻 -- 성교하다, 철저히 망치다 -- 이 겹쳐지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라면 메시지인데 일단 그 번역을 잘 살리지 못한 것을 비롯해, 가뜩이나 평면적인 대사들을 더 평평하게 짓눌러 버렸다. 귀를 열고 감상함이 좋다.]


수많은 섹스 장면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줄거리는 사실 별다른 내용이 없다.

피, 정액, 눈물 -- 그가 인생의 정수로 여기는 것들 -- 로 이루어진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파리로 건너온 미국인 유학생 '머피'는 한 번의 실수로 사랑하는 여자친구 '일렉트라'를 잃고, 사랑하지 않은 여자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감옥 같은 일상을 살아간다. 새해 첫날 일렉트라의 어머니로부터, 지난 몇 달간 일렉트라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머피는, 자살을 우아한 퇴장으로 간주하는 약쟁이 -- 아편, 엑스터시, 코카인 등 손대지 않은 것이 없는 -- 일렉트라가 아마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임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이별 전 일렉트라가 건넨 아편을 삼킨 채 일렉트라와의 관계를 회상하는 머피의 의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두 시간 반 동안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가스파 노에 감독의 팬을 자처했던 평론가들 중 다수는 사실 <러브>에 실망감을 표했다. 모 평론가는 <러브>를 bad sex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 어떤 클라이막스도, 유의미한 대화도 없으며,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나 지리하게 계속되는 성교 같다는 것이다. 구구절절 맞는 설명이다. 그러나 나는 꼭 같은 이유로 이 영화가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란 것은 대개 형편없는 섹스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내 삶이 이렇게 지리할 수는 없다는 절망에서 마약을 하듯 사랑에 빠지고 섹스를 하지만, 그럴수록 약에 취해 있는 시간과 삶의 무미함 사이의 간격은 커질 뿐이다. 서로의 몸, 서로의 존재[presence]를 벗어나 마주해야 하는 세상은 절망적이리만큼 무의미하며, 그 무의미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서로의 몸 속으로 더 깊이, 더 고통스럽게 파고든다. 서로가 없을 때 세상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은 원래부터 무의미하며, 그 무의미로부터의 자기방어를 위해 사랑과 섹스 -- 타인과의 관계 -- 라는 도피처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일렉트라와의 관계를 시작하며 머피는 말한다, 서로를 보호해 주도록 하자고. 머피의 회상은 점점 과거로 흘러, 영화는 머피와 일렉트라가 처음 사랑을 시작한 밤, 서로를 마주한 채 욕조에 앉아 자기의 맨몸이 세상을 막아서는 방패이기라도 한 듯 상대방을 감싸 안고 있는 형상으로 끝난다.


(세상을 등진 채 서로만을 마주하고 서로에게로 도피하는 저 몸짓은 영화에서 여러 번 되풀이된다.)



유의미의 환상을 몸으로, 달콤한 감정으로 지어내지 못할 때 삶은 심연이다. 성교가 끝나면 그 심연으로 회귀해야 할 것을 알기에 성교를 할 때에마저 선행적, 선험적 절망(anticipatory despair)을 느끼며, 그 절망을 잊고자 더 큰 환락과 더 큰 고통을 서로에게서 찾는다.

그 절망적인 포옹을 통해 적어도 내 팔 안의 상대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일렉트라는 머피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거듭 말한다.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머피가 일렉트라가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일렉트라가 생각하는 사랑도, 일렉트라가 마약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일렉트라가 그리는 그림들도, 일렉트라의 가족도, 일렉트라의 행방도 머피는 모른다. 머피가 끝내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나는 이 아이러니한 몰이해의 한 증상이자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랑이 가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미지의 기호이자 결국 '나'를 위한 도피처인 '너'를 향한 일방적 갈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사랑이 시작될 때는 한없이 투명해 보였던 '너'의 마음은 점점 무의미한 삶의 심연 속으로 섞여,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게 된다. (이 인식론적 투명도(epistemological transparency)는 일렉트라의 옷차림에도 반영된다. 한없이 행복했던 처음 몇 달의 일렉트라는 밝은 옷을 즐겨 입고, 올려 묶은 머리로 얼굴을 드러낸다. 관계가 종국으로 달음질하는 몇 달 간 그녀는 짙은 자주색의 두터운 코트로 몸을, 숱 많은 머리와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다. 머피 역시 이 변화를 지적한다. 가끔 네 포니테일이 그립다고. 그 때[행복했던 과거]에는 이 안경도 안 쓰지 않았느냐고.)

머피가 일렉트라를 처음 만난 날, 일렉트라는 말한다. 사랑이란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그 무언가이며, 머물고 싶은 장소 같은 것이라고.

그 무언가가 실재하는 것인지, 마약이 가져다주는 짜릿함 같은 신기루인지는, 3D 안경을 벗으며 스스로 판단하시길.



이미지 출처

https://imaginepepperland.files.wordpress.com/2015/09/picmonkey-collage.jpg

http://66.media.tumblr.com/1e7c4208b59187fa897e1f1af90a65fc/tumblr_nxk0amoHjp1qkpgtlo1_500.jpg

http://pixel.nymag.com/imgs/daily/vulture/2015/10/15/magazine/16-gaspar-noe-2.nocrop.w529.h37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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