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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과거 완료, 패스트 퍼펙트 과거 완료, 패스트 퍼펙트 (며칠에 나누어 여러 문단씩 쓴 글이라 어느 문단의 어제가 어느 날인지 알 길이 없다. 삶은 요일에서 비끄러져 나와 어제와 오늘과 내일, 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다.) 1. 목요일이 추석이라는 걸 문득 깨닫고 명절 음식을 해 볼 생각을 한다. 추석 음식은 무엇이 있는지도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검색을 해 보니 토란탕, 송편 같은 것이 나온다. 나는 엉뚱하게도 김밥을 싸고 만두를 빚고 싶다. P에게도 시간이 맞는다면 먹여 볼 생각이니 아마 햄이나 다진 돼지고기니 하는 것은 죄 빼고 두부와 버섯, 다진 김치와 부추 등속을 잔뜩 넣어야 할 것이다. 어제는 파머스 마켓에 다녀와, 블루치즈와 피칸을 넣어 스콘을 열두 개 구워 내고 -- 직사각형의 반죽을 밀가루를 묻힌 칼로 우선 여섯 개.. 더보기
맨발로 길을 건너던 맨발로 길을 건너던 파티에 남자친구를 데려가, 동기들에게, 선후배들에게 소개를 이럭저럭 해 주게 되었다. 남자친구의 친구들은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다 만나 보았던 터라, 어젯밤으로 대충 인간관계망의 평형은 맞췄다. 같은 자기소개를 십수 번 듣고 ("안녕, 난 P야. 재키랑 같이 왔어." "너도 H대 학생이야?" "아니, 난 M 공대."), 겨울쯤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남미 출신 친구들에게 초대도 받고, 이런저런 놀림도 당하고 ("지난 2주 동안 네가 밥을 다 했으면 재키는 아무것도 안 한 거야?" "아냐, 어제 저녁의 블론드 브라우니는 재키가 그래도 반쯤 만들었어."), 터무니없는 양의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내가 지독히 싫어하는 유명한 교수 하나에 대해 험담을 한참 하고 나니 자.. 더보기
욕심의 반비례 욕심의 반비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지만 아니기도 한 -- 세상의 모든 국제연애자들, 모든 '세계의 끝 여자친구'들을 위해. (사실 옛날 사람들은 은하 같은 강을 건너면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알았고, 고인 같은 애인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경으로 오작교를 하늘에 지었을지도 모르죠. 비행기가 생기고 비디오채팅이 생겼다고 사람 사는 것이 그리 다를까요.) -- "누가 보아도 나더러 읽으라고 내놓은 글이라 거듭거듭 읽었거든요.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런 글은 잘 썼고 못 썼고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기보다는 그냥 자기에 대해서 쓴 글이라서 괜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라데요. 아마 그 말이 맞을 거예요. 잘 쓴 글이라는 게 결국 나에게 말을 거는 글이니까요. 사적인.. 더보기
집밥 블루스와 미역국 - 연애를 마치고, 시작하며 집밥 블루스와 미역국- 연애를 마치고, 시작하며 방에 한 사람 몫의 물건이 더 있는 걸 빼면 삶이 대체로 단출하다. 잘 하면 올 시월에는 한국어라곤 한 마디도 모르는 남자가 미국 미역으로 쇠고기 없이 끓인 미역국을 먹게 될 것 같다. 기분이 묘하다. 우리 집 식구들은 원래 요리 잘 안 한다고, 엄마 생일과 내 생일이 시월에 일 주일 간격이라 미역국을 끓여서 한 달을 먹는다고, 그런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니 P는 핸드폰을 꺼내 '한국 해초 수프'를 검색한다. 이걸 아예 버스데이 수프라고 부르나보네, 하면서 레시피를 쭉 훑어보더니 아마 끓일 수 있을 것 같단다. 내 미역국은 그렇게 버스데이 수프가 됐다. 미역국에 찰밥을 말아 불려 먹고 싶어진다. 딴에는 '집밥'을 먹고 있기는 하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연애.. 더보기
메밀꽃과 세르비안 쇼: 봉평에서 세계문학 생각하기 메밀꽃과 세르비안 쇼: 봉평에서 세계문학 생각하기 “세르비안 쇼는 노래와 춤을 밑천 삼아 이곳으로 흘러든 가무단으로 반드시 세르비아 사람들로만 조직된 것이 아니라 10여 명 단원이 백계 노인을 주로 하여 폴란드, 유태猶太, 헝가리, 체코 등 각기 국적을 달리하고 가운데에는 유라시안도 끼어 있는 마치 조그만 인종의 전람회를 이룬 듯한 혼잡한 단체였다. 그들의 노래와 춤이 그닷 놀라운 것은 못 되었으나 그들의 색다른 자태가 낯선 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족했고 우리의 관주館主가 상당히 비싼 조건으로 그들과 선뜻 계약을 맺은 것도 그 점을 노려서였다. 한 시간가량씩 하루 두 번씩 출연에 대한 사례가 500원, 엿새 동안에 3,000원이라는 것이 그들을 맞이하는 거의 최고의 대접이었으며 생각건대 만주 등지.. 더보기
빈집 서울을 떠나고 싶어져 비행기를 앞당길 궁리를 한참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헛일이다.열대야로 새벽 한두 시가 되어도 잠들기가 어렵다. 때마침 시작된 생리에 온몸이 꿉꿉하고 저리다. 생명을 내보낸 도시가 말라붙은 고치처럼 찢어진 귀퉁이로부터 서걱이며 부서져 나간다. 나는 천장을 보며 너와 함께 보았던, 너와 함께 보지 못한, 너와 함께 볼 수 있었을, 그리고 너와 함께 보지 못했을 영화들을 셈해 보았다. 집은 사람이 떠난다고 함께 떠날 수 없다고, 네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고, 너는 말했다. 나는 왜 우리는 집과 여행자의 관계가 되어야만 했는지를 생각했다. 네 어깨와 가슴팍에 눈믈이 그렁하게 맺힌 속눈썹을 닦고 싶었다. 나는 울기를 잘 했고 너는 울리기도 달래기도 잘 했다. 네가 두고 간 책 .. 더보기
리뷰: 가스파 노에의 <러브> (2015) 에로티카를 평함에 있어서도 내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에로티카는, A) 최대한 성적인 컨텐츠를 가장 노골적으로, 가장 미학적으로 표현하되, B) 각 장면이 관객으로 하여금 자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영화가 끝난 후 오히려 인생에 대한 절망감으로 자위 욕구를 느끼게끔 한다면 보너스 포인트.) 그런 의미에서 가스파 노에의 는 멋진 에로티카다. 위의 두 기준을 설명하면 으레 돌아오는 질문은 A는 그렇다 쳐도 왜 B를 고집하는가, 인데, 에로티카는 포르노그라피와는 다르다. 포르노그라피가 소모품이라면 -- 저는 소장하는데요? 라고 또 으레 반문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모성은 음식물의 소모와도 같은 것이다. 짜장면을 일주일에 한 번씩 시켜 먹는 것과, 이 집의 .. 더보기
가질 수 없는 것들의 박물관 1 야한 연애소설을 쓰기는 쓰는 거냐고들 하시길래. 뭐라도 조금씩 쓰고 있음을 증빙하는 자료로 올립니다. 가질 수 없는 것들의 박물관#1 일랴 이삿짐이 가득한 방에서 여자는 언제나처럼 남자를 맞았다. 재회가 영 없을 이별도 있다.그래서 남자는 어느 때보다도 길고 잠잠하게 여자의 성기에 입을 맞췄고, 여자는 눈앞에 오가는 남자의 얼굴을 피하지 않은 채 남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지막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입과 입이 만나 체액을 나누고, 입과 성기가 만난다. 남자는 늘 여자를 갖기 전 여자의 입을 먼저 원했다.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여자의 기도가 막혀오기까지 여자의 입 속으로 성기를 밀어넣었다. 그렇게 잠시 들숨과 날숨이 멈추는 순간이면 여자는 늘 어금니 안쪽을 눌러 오는 남자의 성기에 포진해 있.. 더보기
가벼움과 무거움과 말과 돌 가벼움과 무거움과 말과 돌 나는 너에게 비트와 바이트로 글을 쓰고 있다. 칼비노는 1985년, 하버드에서의 강연을 앞두고 사망했으며, 그가 보았던 가벼움의 정수 -- 해저를 지나는 전화선 -- 는 지금 우리 삶에서는 오히려 이미 무거운 침전물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의 파편과 자음과 모음이 -- 0과 1과 미세하고 균일한 파동 여럿으로 쪼개진 음성들이 -- 내 주변의 허공을 날고 있다. 요즘 이탈로 칼비노라는 작가에 푹 빠져 있다. 아마 영 불가능한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 내가 언어 여러 개를 실제로 배워 내서 구사해야 하는 학생이 아니라, 그냥 책 좋아하는 애서가였다면 --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는 책을 어떻게든 구해, 내 알량한 불어와 서반아어에서 라틴어 어원을 끄.. 더보기
계절적 대안적 사랑 (친구 남자친구 분들 중에는 제가 남자친구 얘기 쓰는 걸 부러워하시는 분도 있던데. 제 남자친구는 참고로 제가 자기 얘기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닌가?) 원고번호 2 작희계절적 대안적 사랑 아마 현실적으로 성취가 불가능한 소원이겠지만, 나는 떠날 때 신발을 좀 선물 받고 싶다. 신고 오래 걸어도 편안한 신발. 광야를 오래 걸어도 해지지 않고, 닳지 않을 신발. 물소 가죽 신발. 투박한 신발. 여자가 떠날 때 신발을 선물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아마 -- 떠났지만 -- 그 사람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걷는 길이 다르더라도 너의 꿈을 응원한다는 뜻이니까. 내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예쁘고 불편한 신발을 줄 이유는 없다. 굳이 준다고 하면 그것은 모욕의 한 방법일 것이다. 신고 오래 걸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