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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과거 완료, 패스트 퍼펙트

과거 완료, 패스트 퍼펙트


(며칠에 나누어 여러 문단씩 쓴 글이라 어느 문단의 어제가 어느 날인지 알 길이 없다. 삶은 요일에서 비끄러져 나와 어제와 오늘과 내일, 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다.)


1.


목요일이 추석이라는 걸 문득 깨닫고 명절 음식을 해 볼 생각을 한다. 추석 음식은 무엇이 있는지도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검색을 해 보니 토란탕, 송편 같은 것이 나온다. 나는 엉뚱하게도 김밥을 싸고 만두를 빚고 싶다. P에게도 시간이 맞는다면 먹여 볼 생각이니 아마 햄이나 다진 돼지고기니 하는 것은 죄 빼고 두부와 버섯, 다진 김치와 부추 등속을 잔뜩 넣어야 할 것이다.

어제는 파머스 마켓에 다녀와, 블루치즈와 피칸을 넣어 스콘을 열두 개 구워 내고 -- 직사각형의 반죽을 밀가루를 묻힌 칼로 우선 여섯 개의 정사각형으로 나누고, 그 정사각형을 다시 대각선 방향으로 한 번씩 자르면 열두 개의 직각삼각형이 생긴다 -- 옥수수와 레드빈에 양념을 해 수프를 끓였다.

손이 베이고 데인 상처로 따갑고 쓰리다. 다만 오늘 아침 따뜻하게 데운 스콘에 잼과 커피를 곁들여 먹으니, 아무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오븐이 있고, 잼과 버터가 있고, 벽난로가 있고, 읽을 책이 있고, 오스트리아산 와인이 있는 일상은 감사한 삶이다. 어제 외식 메뉴는 날더러 고르라기에 집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그리스 식당을 검색해 -- "보르시를 만들까 했는데 나 지금 갑자기 내 얼굴만큼 큰 유로[gyro]가 너무 먹고 싶거든. 양상추에서 소스를 뚝뚝 흘리고 손에 다 묻혀 가면서. 역에서 좀 멀긴 한데, 여기 어때." "굿 초이스." -- 링크를 전송한다.

10월의 시카고 여행을 계획하고, 새 눈 장화를 사고, 세탁기를 돌리기 위해 필요한 25센트짜리 동전을 이곳저곳에서 모은다.

어렵사리 되찾은 삶이 좋다.


2.


제일 최근에 운 게 언제야?

음 - 매운 거 먹고 눈물 두어 방울 나는 그런 것 말하는 건 아니지?

그렇게 대답해도 돼. 질문의 의미론을 잘못 해석해도 좋아, 네 자유야.

아마 전 여자친구랑 헤어졌을 때인 것 같은데. 근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렇구나. 

너는?

나 되게 자주 우는데. 그래서 최근을 기억하기도 어려워. 그래도 비교적 최근에 운 걸 생각하면 웃기는 기억은 하나 있지. 전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나서 교회에 가서 예배 시작할 때부터 펑펑 울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내가 아마 다른 이유로 우는 줄 알았을 걸. 속죄, 참회, 그런 거 -- 아마 어떤 의미에선 참회이기도 했을 거야.

뭘 참회했는데?

흠. 그 관계 전부를.

울지 말고. 웃어, 재키, 이렇게.



3.


진짜 이야기는 이렇다.

오후엔 과 사무실엘 다녀왔다. 삶은 12월부터 엉망진창이었던 터라, 오늘까지 논문을 하나 제출하지 않으면 한 학기 장학금과 생활비를 모두 잃을 뻔 했던 터다. 돈이 없으면 공부를 할 방법도 삶을 도모할 방법도 없으니 나는 얌전히 무릎을 꿇고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을 터다. 일단 제출해야 하는 과제는 모두 제출해, 교수님들이고 서무실 직원들이고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쉰다.

지도교수님께 너무도 당연히 꾸지람을 듣는다.

- 너는 지난 일요일에 이 논문을 시작했다고 했는데, 일요일에 시작해서 화요일에 제출할 논문이라면 지난 학기 말에 진작 시작해 제출했으면 되었을 일 아니니. 실망이야, 재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이메일이 그러했으니 공문들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대충 짐작을 해도 좋다. 친구들 집에 가서 차를 마시며 잘 해결은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니, 그래, 제발 추방당하지 마,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 그래도 훨씬 안정돼 보이고 좋다. 지난 학기에 너 완전 무슨.

- 알아, 막장이었던 거.

- 그래, 너 완전 막장이었어.


막장은 광산 갱도의 가장 막다른 곳이다.

게으름, 무기력, 침잠에 대한 그럴싸한 변명은 없다. 논문이고 뭐고 쓰고 싶은 기분이 도통 안 들었다고 말하니 다들 납득하지 못한다.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 두었으면 증거물이라도 제출했으련만.

그래서 오늘은 여기저기 -- 친구들은 이미 대충 사정을 알고 있었으므로, 과 사무실 직원, 교수님들께 모두 -- 대충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굉장히 오래 만나던 사람이 있었는데, 헤어졌거든요. 헤어지는 건 금방인데, 헤어지기까지,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심리적으로는 이별 과정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삶이 한동안 엉망이었어요, 그래서.

변명인지 아닌지는 나도 사실 확신이 없다. 다만 아닌 게 아니라 그래서 삶이 엉망 -- 막장 -- 이기는 했고, 그것과 무기력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한들, 우리는 삶이 엉망인 사람에게서 활력을 바라지 않는다.

- 여기 우린 다 괜찮아, 재키. 행정적 절차지. 서무실에만 제출하면 별 일 없을 거야.

- 늘 고마워요, 멜리사, 월요일에 제출하고 바로 이메일 보낼게요.

- 언제든지.



4.


그렇게 누군가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 시점으로 비로소 옛 연애는 온전한 과거 시제가 된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언어도, 어떤 텍스트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마법이 끝났고, 그래서 나는 사활을 걸고 이십 페이지의 논문을 썼다.

(삶을 담보로 글을 쓴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홀려 미국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결정한 그 때에도 제출기한을 맞추기 위해 사흘 밤낮 미친 사람처럼 글을 썼고, 대학원 원서를 제출할 때에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뭔가에 쫓기고 눌려 석 달의 기한이 사흘이 되었을 때 비로소 마음이 다급해져 자해를 하듯 글을 쏟아낸다. 그렇게 쓴 글을 팔아 대학도 오고 대학원도 왔다. 삶은 내게는 늘 글로 -- 쓰든, 읽든 -- 구입하고 구하는 것이다.)

과거의 망령으로 삶을 중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현재를 도모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 있지 못한 것이다. 그 현재가 미래로 가는 길이든, 과거에서 이어지는 끈이든.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미궁 속에서만 쓸모가 있는 '장치'다.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를 차지하는 것 역시 그런 점에서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인 셈이다. 아리아드네는 자기 몫을 다했고, 그 역할이 만료된 인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퇴장해야만 이야기는 앞으로 흘러간다.

삶의 의지라는 게 대개 그렇다. 어제, 오늘, 내일, 어제, 오늘, 내일.


사는 게 원래 그런 것일 터이다. 항상성을 유지하는 수면에 일어나는 약간의 떨림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관찰하고 애무하는 것. 집 밥이라는 것도, 애인과의 섹스라는 것도. 그런 게 일상성[日常性]이다. 글로 연명하는 삶에 여러 박자로 균형을 맞추고, 최대한 많이 웃고 최대한 많이 사랑하려고 -- 매일의 삶이 가져오는 모든 요철과 빛깔과 촉감을 사랑스럽게 여기려고 -- 노력하는 것.

서로의 싱거운 농담에 --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둘 다 치매를 앓으셔서. 한 번 들으면 재밌는데 여러 번 똑같이 들으면 지루해지는 얘기들 있지, 어떻게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만났나, 하는 그런 얘기들, 그런 걸 몇 번이고 하셔." "어쩌면 일부러 그러시는 것 아닐까. 네가 모르는 변주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걸 퍼즐 맞추듯 찾아 보면 어때." "매번 디테일이 바뀐다든지?" "그래, 칼비노처럼." "Invisible grandmothers." -- 배가 아프도록 웃는 것.

천장과 바닥이 다 흔들리도록 서로의 몸 곳곳을 탐닉하고는 <랍스터>를 다운로드받아 벗은 몸을 포개고 영화를 보는 것. 영화를 보다 말고 내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엉덩이에 입을 맞추는 사람을 끌어다 안고 다시 아무 걱정 없이 웃는 것. 긴 여행 끝에 이 도시로 돌아온 내 옷을 모두 벗겨 내고 울 것 같은 목소리로 "I missed your beautiful body"라고 속삭이던 사람을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을 기반으로 최선의 현재를 쌓고 닦으려고 노력하는 것.

어차피 삶은 지층이다. 거대한 운석과 충돌해 통째로 타들어가기 전까지는 삶은, 삶이라는 행성은, 존재하게 되어 있다.

그 존재의 기억을 간직하는 것,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죽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삶에 대한 책임이다.

그래서 망자의 기억을 홀대하는 것은 죄된 행위다. 그것이 세월호든, 공룡이든, 홀로코스트든, 인류라는 기이한 종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지금도 죽어 나가는 수많은 동물종이든. 기억은 삶의 기반이다. 그것이 과거에 대한 예의이고, 동시에 현재에 대한 예의를 갖추게 하는 기반이기도 하다.

어제, 오늘, 내일.



5.


그렇게 지나간 사랑은 늘 완벽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요즈음 부쩍 회한이 생겨요.

그 모든 마음들이 이미 사랑이 아닐 때까지, 앙금이 가라앉고 찌끼가 낄 때까지 당신과 나는 사랑을 말했으니까요. 그 찌끼를 걷어 내고 남는 어린 마음을 손에 가만히 받아 들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었으니까요.


이 사람 사랑스럽답니다.

친구들이 만나 보고는, 하이스쿨 뮤지컬의 잭 에프론 같다고, 햇볕 같은 사람이라던데요. 다 식은 반숙의 축축한 계란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나와 달리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바닥이 바작하도록 부쳐 낸 -- "아 맞다, 계란 후라이 어떻게 좋아해? 내 계란 사람들이 다 싫어해, 바닥이 딱딱해서." "알아서 하세요, 셰프님. 난 계란이면 다 좋아." -- 써니 싸이드 업의 계란을 보고 그쯤은 나도 알았지요. 예쁘고 밝은 사람, 레이니 무드의 내 인생에 해 같은 사람. 

어젠 다소 기이한 자세의 성교를 끝내고 -- 음, 뭐랄까, 약간 두족류 같은 기분이 들었지요 -- 서로의 벗은 몸을 포갠 채 영화 <랍스터>를 같이 보았네요. 폼페이에 가 보았나요? 난 종말을 맞는다면 나신인 순간 -- 다른 육체에 찬란히 감싸인 순간 -- 아니면 내 엉덩이에 어떤 예쁜 입술이 맞닿아 있는 순간 -- 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 화석들을 단죄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 리 없으니까요.


인생 경험이라고 생각하기에도, 패스트 퍼펙트를 외치기에도 너무 긴 시간이었지요. 그럴 가치가 있었나, 까지를 고민하게 되고, 그럴 때면 배신감까지 느껴요. 모든 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걸까요? 어느 순간 만료된 관계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요? 당신과 나의 관계는 언제쯤 만료되었던 걸까요. 당신이 키우고 있던 희망은 어떤 것이었나요. 당신과 내가 사랑했던 나날들도 언젠가 이해되기를 바라며 당신과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해한다고, 아름다웠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아요. 당신과 나는 더 일찍, 더 젊은 나이에, 서로를 놓아 보낼 수는 없었던 걸까요. 서로의 기억들이 상처로 남기 전에.

모든 것을 이미 소화했고, 모든 것은 이미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에도 너무나 긴 시간이었어요.

당신과 나의 리듬은 이미 오래 전에 어긋났었는데도.



6.


어제, 오늘, 내일.

그리하여 내일은 추석이고, 나는 김밥을 말아 볼 고민을 한다.

일주일에 두 번, 섹스가 반절인 데이트를 하고, 청강하는 수업까지를 포함해 일주일에 대여섯 번 등교를 한다.


심심하면 여행 계획을 짠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카고, 모스크바.

스물 네 살 생일도 가까워 온다. 작년 이맘때보다는 조금이라도 덜 어린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