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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맨발로 길을 건너던

맨발로 길을 건너던


파티에 남자친구를 데려가, 동기들에게, 선후배들에게 소개를 이럭저럭 해 주게 되었다.

남자친구의 친구들은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다 만나 보았던 터라, 어젯밤으로 대충 인간관계망의 평형은 맞췄다. 

같은 자기소개를 십수 번 듣고 ("안녕, 난 P야. 재키랑 같이 왔어." "너도 H대 학생이야?" "아니, 난 M 공대."), 겨울쯤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남미 출신 친구들에게 초대도 받고, 이런저런 놀림도 당하고 ("지난 2주 동안 네가 밥을 다 했으면 재키는 아무것도 안 한 거야?" "아냐, 어제 저녁의 블론드 브라우니는 재키가 그래도 반쯤 만들었어."), 터무니없는 양의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내가 지독히 싫어하는 유명한 교수 하나에 대해 험담을 한참 하고 나니 자정다.

동기들에게 인사를 하고, 캄캄한 현관에 쌓인 수십 켤레의 신발 속에서 내 구두 두 짝을 용케 다 찾아 밖으로 나섰다.

남자친구가 불러 둔 우버는 길 반대편에 서 있다. 금방 차에 올라타고 실내에 다시 들어갈 텐데, 하는 생각에 신발을 꿰어 신는 대신 한 손에 들고 맨발로 길을 건넜다.


길을 건너는, 아마 일 분도 안 되었을 그 짧은 시간 동안 뭔가를 깨달았다.


사실 요즘 늘 생각은 많았다.

삶이 외롭지 않은 건 일단 낯선 기분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 혼자로 존재하기 --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죄책감이 문득문득 삶에 스며 파문[波紋]을 만들었다. 있던 것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마이너스로 늘 존재했던 무언가가 사라져 생겨난 부재의 부재 때문이다. 부재의 부재가 다시 부재로 느껴지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음수에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되는 법이라고 나는 일단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양수로 사는 법을 오랫동안 잊고 살아서 생겨난 이질감일 수도 있다. 아주 옛날에 절단되었던 팔이나 다리가 다시 자라난 것처럼 엉성한 기분.

가장 유쾌한 순간도 예외는 아니어서 -- 깔깔 웃으며 책상을 함께 조립할 때도 -- "책상 조립. 가장 중요한 스텝 원, 맥주를 준비한다. 스텝 투, 방이 더우니 옷을 모두 벗는다." -- 간지럼을 태우다가 양 팔목을 잡혀 배가 아프도록 웃으며 몸부림을 칠 때도 -- "너 완전 사악해. 게다가 간지럽히는 사람이 더 많이 웃냐." "놔 주면 그만할게, 약속." "못 믿어." "뭐야, 이 신뢰의 부재는?" "이거 봐, 불신은 관계에 있어서 좋지 않아, 재키." "놔 주면 안 한다니까?" -- 내 삶이 아닌 삶을 사는 것처럼, 수족관의 벽에 간 금을 발견하는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알싸한 기분으로, 시공간이 한 찰나씩 얼어붙었다. 며칠, 몇 주를 그렇게 살았다.


다만 어젯밤, 살짝 취해 맨발로 길을 건너는 그 시간 동안 알 수 없는 확신이 생겼다.

원인은 아무래도 알 수 없다. 동기들의 남자친구, 남편들 맥주를 마시며 자기의 대학 도시 이야기, 재즈 얘기를 하는 P가 사랑스러워서였을 수도 있고, 남자친구야? 하고 둘만 아는 언어로 물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여 준 언니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아 보여서 좋다고, 정말 좋다고 진심으로 행복해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진작에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 -- 좋아 보이지 못한 것이 -- 도리어 미안해진 탓일 수도 있다.

그 확신의 정확한 내용도 불분명하다. 다만, 대충은.

원래 이런 거라는 것. 

이 이상한 문장의 주어가 무엇인지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냥.

원래 이런 거라는, 원래 이런 거였다는. This is what it is. This is what it is supposed to be. This is what it could be, could have been, might have been. 그게 삶이든, 연애든. 집에 돌아온 것처럼, 집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무엇 하나만 오래 전에 포기했더라면 맨발로 길을 건너듯 진작에 돌아왔을 수도 있는 집.

여하튼, 이러한 이상한 문맥으로, 책과 옷가지를 친구 집에서 모두 찾아 온 어제를 기준으로, 깨진 거울 파편처럼 은하 사방으로 흩어 뒀던 내 마음도 이사를 마쳤다.



때문에 오늘 아침은, 몸이 안팎으로 다른 몸에 감싸여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명을 지르는 동안에도, 시트에 묻은 희끄무레한 얼룩을 닦아 내는 동안에도.

내 몸과 수시로 교통하는 그 몸이 내 냉장고와 선반을 뒤져 만들어 낸, 피망과 양파와 치즈가 든 오믈렛과, 사르데냐 산 천일염을 뿌린 아보카도 토스트를 먹는 동안에도, 현관에 서서 그 몸을 배웅하는 동안에도.

그 순간에 온전히, 분절 없이, 평행의 세계도 없이, 거주하려고 애를 쓴다. 삶은 대개, 원래, 아마도, 그런 것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걸 나와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이라고 부르며 실천할 수도 있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