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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욕심의 반비례

욕심의 반비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지만 아니기도 한 -- 세상의 모든 국제연애자들, 모든 '세계의 끝 여자친구'들을 위해.

(사실 옛날 사람들은 은하 같은 강을 건너면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알았고, 고인 같은 애인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경으로 오작교를 하늘에 지었을지도 모르죠. 비행기가 생기고 비디오채팅이 생겼다고 사람 사는 것이 그리 다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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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아도 나더러 읽으라고 내놓은 글이라 거듭거듭 읽었거든요.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런 글은 잘 썼고 못 썼고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기보다는 그냥 자기에 대해서 쓴 글이라서 괜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라데요. 아마 그 말이 맞을 거예요. 잘 쓴 글이라는 게 결국 나에게 말을 거는 글이니까요. 사적인 글은 너무도 당연히 구구절절 내게 말을 걸어 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인데, 아마 그 옛날에도 당신이 내게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걸어 오지 않았더라면 술을 그렇게 먹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요즘도 잘 버티고 있었는데, 국경과 바다와 페넬로페를 엮어 놓은 그 글을 보니까 누가 머리 위에 물이라도 엎지른 것처럼 속이 상해서, 전날 밤 남겨 둔 와인 반 병을 혼자 다 비웠네요.

걱정 말아요, 벌써 며칠 전 일이니까. 하루에 반주로 350밀리리터 들이의 맥주 한 병씩을 마시는 게 다인데, 그 밥도 꼬박 누군가랑 같이 먹고 있거든요. 열두 시 반이면 대충 잠이 들고, 여덟 시 오 분 -- 이 사람은 알람 시간이 여덟 시 오 분이더라고요. 나도 늘 알람을 그렇게 맞추곤 했어요, 여덟 시면 오 분 어차피 더 자고 싶을 테니까, 오 분을 더해서 여덟 시 오 분. -- 이면 일어나요. 사실 그것보다 나는 조금 더 일찍 잠에서 깨긴 하는데, 그럼 그 이삼십 분은 옆에 누운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거나 만져 보거나 하면서 보내요.


차라리 나도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데 -- 뉴올리언즈, 발티모어, 시카고, 내 여행 지도의 북아메리카는 양 해안가를 겨우 찍고는 아직 공백이니까요 -- 내 카타르시스라곤 골반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속옷에 핏자국이 배어날 때까지 -- 농담이 아녜요, 아프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몸이 놀랐는지 피가 묻어나더라고요 -- 하루에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붐붐하는 일밖엔 없네요. 전에 그 소설을 읽을 때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지옥불 속에서도 인간은 붐붐할 수 있어서 인간인 것 같아요.


망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오히려 2월 무렵부터 망가져 있던 것들을 하나씩 회복시키고 있는 기분이죠. 오랜만에 만난 친구도 좋아 보인다고, 좋아 보여서 맘이 놓인다고 하던걸요.

그래요, 좋아요.


그런데, 로 시작하는 다른 이야기를 붙일 여지도 없이 그냥 좋아요, 사실.


이 연애 -- 지금의 이 연애 말이에요 -- 욕심 좀 부린 연애거든요.

내가 바라던 것들은 적당히 다 있는 연애, 검소하지 않은 연애. (미역국은 없네요. 근데 그건 원래도 없었으니.) 연애가 집이라면 처음으로 냉장고도 가져 보고, 누비 이불보도 가져 보고, 옷장도 가져 보는 것 같은, 그런 연애요.

여지껏 연애에 그렇게 욕심 부려 본 적 없거든요, 알잖아요.

나는 매사에 욕심이 많은데도요.

당신이 내게 주는 것 -- 가끔 차고 넘쳤지요, 그래요. 당신이 나와 함께 보고 먹기 위해 찾아 놓은 그 많은 것들. 마주보고 앉아 먹었던 카레우동과 만두와 문어튀김과 다른 모든 따뜻하고 노릇한 음식들 -- 을 기쁘게 살뜰하게 모으고 아껴서 그렇게 살았어요. 내게 줄 수 없다고, 그런 것들은 당신과는 가질 수 없을 것들이라고 당신이 포기한 것들은 나도 체념했어요.


그런데.

당신과 나 사이에야말로 언제나 그런데, 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나도 언제나 욕심을 더 부릴 수 있었던 거잖아요.

한 달에 한 번 비행기를 타고 와서 요리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아니라 원한다면 한 주에 몇 번이라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 생리통으로 앓아 누웠다고 하면 단 과자를 만들어 사무실까지 가져다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 수도 있는 거였잖아요. 

피크닉 도시락에 맥주를 싸 들고 같이 야외 극장에서 셰익스피어를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을 수도 있는 거였잖아요.

잘생긴 사람, 어깨와 가슴팍이 단단한 사람을 만나고 싶을 수도 있는 거였잖아요.

나라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던 건 아니잖아요. 내가 못나고 괴팍해도, 사춘기 이래로 마음이 건강했던 적이 없어도, 욕심 낼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잖아요. 

그건 내가 네게 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지만 그걸 모두 체념하면 나를 얻는다고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적어도 서로가 서로로 인해 포기하는 일들이 얼마나 되는지 재어볼 용기쯤은 있었어야 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최선이라고, 그 모든 체념을 능히 메울 수 있다고 자신해선 안 되는 거였잖아요.



일단은 좋아요.

당신에게서 찾아냈던 것 같은 수많은 지엽들을 이 사람에게서도 찾고 있어요. 잠버릇, 눈가의 잔주름, 손금, 수염이 자라나는 부분, 좋아하는 음식, 음악, 영화, 맥주. 아마 내 음악 취향은 또 한바탕 바뀌지 않을까 해요. 영혼에 나이테가 있다면 아마 그런 거 아닐까요. 특별한 영화, 노래, 장소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사는 기후와 환경으로부터, 켜켜이 쌓여 굳어지는 것. 사람은 나무가 아니라 거처를 옮길 수 있지만, 거쳐온 삶의 흔적, 관계의 흔적을 내 안에 어떤 형태로든 지니게 되는 것.

(당신과 나의 나이테가 서서히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요. 내가 마시는 맥주와 당신이 마시는 맥주가 달라지면서. 나의 점심거리 -- 고수가 잔뜩 든 쌀국수 샐러드 -- 와 당신의 점심거리가 달라지면서. 내가 먹고 마시고 읽는 것들을 당신에게 설명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부터. 그래도 노력했어야 했던 걸까요. 결국 내 잘못인 걸까요.)


일단은 좋아요.

땅콩버터 소스에 버무려서 큰 용기에 가득 채워 준 국수도 좋고, 나무 잎사귀에 구리 코팅을 해서 펜던트를 만들고 은 체인을 주문해서 나 주려고 만들었다는 목걸이도 좋고요. 채소 먹으라고 끼니마다 파프리카며 오이를 다듬어 오색으로 아삭한 샐러드를 만들어 주는 것도 좋아요. 내 말대로 길러 뒤로 넘기고 있는 곱슬머리도 좋네요. 얼굴에 햇살이 들면 갈색 눈이 올리브빛이 되는 것도 좋아요. 늘 물을 마시는 것도, 찬물을 한 컵 가득 들이킨 후에 찬 입술로 내게 입을 맞추면 나도 물을 마신 것처럼 해갈이 되는 것도 좋아요. 냉장고에 냉수가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하려고 늘 정수 필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얼음까지 넣어 두게 되는 나도 좋고요.

박물관 좀 다녀 본 나조차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감탄한 작은 미술관에 손 잡고 들어가서, 학생증을 나란히 내밀어 공짜 입장권을 받는 일도 좋고요.

M대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칼비노 소설 한 권을 번갈아 가며 함께 읽고 있는 것도 좋아요.

가끔 사람이 너무 똑똑해서 짜증이 슬그머니 나는 것도 싫지 않고요.

어쩌다 하트 모양으로 배열된 나노 입자들의 현미경 사진을 보내 주는 것도 좋아요.


일단은 좋아요.

좋아요. 모든 게.


소중한 걸 찾으려고 떠난 게 아녜요. '삶의 편향'을 위해 소중한 걸 버리는 법도 알고 싶었을 뿐이죠.

삶을 도모하고 싶었어요.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요.

반죽음 같은 열정이 아니라, 삶의 기분요.



당신도 나로 인해 잃은 걸 찾길 바라요.



고마웠어요.

누가 뭐라든,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 줘서요.

어떤 방식으로든 그걸 깨닫게 해 줘서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