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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메밀꽃과 세르비안 쇼: 봉평에서 세계문학 생각하기

메밀꽃과 세르비안 쇼: 봉평에서 세계문학 생각하기


“세르비안 쇼는 노래와 춤을 밑천 삼아 이곳으로 흘러든 가무단으로 반드시 세르비아 사람들로만 조직된 것이 아니라 10여 명 단원이 백계 노인을 주로 하여 폴란드, 유태猶太, 헝가리, 체코 등 각기 국적을 달리하고 가운데에는 유라시안도 끼어 있는 마치 조그만 인종의 전람회를 이룬 듯한 혼잡한 단체였다. 그들의 노래와 춤이 그닷 놀라운 것은 못 되었으나 그들의 색다른 자태가 낯선 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족했고 우리의 관주館主가 상당히 비싼 조건으로 그들과 선뜻 계약을 맺은 것도 그 점을 노려서였다. 한 시간가량씩 하루 두 번씩 출연에 대한 사례가 500원, 엿새 동안에 3,000원이라는 것이 그들을 맞이하는 거의 최고의 대접이었으며 생각건대 만주 등지에서 일없이 뒹굴던 동호자들이 가지고 있는 재주들을 모아 일거에 탐탁한 벌이나 해 보려고 멀리 외지로 원정을 나온 그들로서도 역시 재주보다는 자기들의 그 이국적 풍모를 미끼 삼아 보겠다는 심리가 없지도 않을 듯하다. […] 더구나 내게는 하찮은 그림장이나 그려서 먹고사는 몸이기는 하나 외국어의 소양이 얼마간 있었던 까닭에 그들의 서툰 일어와 맞서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외국어의 범벅으로 의사를 소통하는 편이 피차에 편한 노릇이어서 관주도 그들과의 교섭에 나를 내세운 셈이었고 그들 역 나를 의뢰하고 믿는 바 많았다.” [이효석, <여수>, p. 286-87]

“구라파에 대한 애착을 나는 가령 구라파 사람이 동양에 대해서 품는 것과 같은 그런 단지 이국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보다도 한층 높이 자유에 대한 갈망의 발로라고 해석해 왔다. 문화 유산의 넉넉한 저축에서 오는 풍족하고 관대한 풍습이야말로 가장 그리운 것의 하나이다. 막상 밟아 본다면 그 땅 역시 편벽되고 인색한 곳일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영원히 마지막의 좋은 세상은 올 턱 없는 인간 사회에서 얼마간의 편벽됨을 면할 수 없는 사정인 것이요, 실제로 밟아 보지 않은 이상 그리운 마음이 그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고집을 피우고 빗디디든 간에 오늘의 세계는 구석구석이 그 어느 한 곳의 거리도 구라파의 빛을 채색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현대 문명의 발상지인 그곳에 대한 회포는 흡사 고향에 대한 그것과도 같지 않을까. 지금의 내 심정은 구라파로 가고자 하는 스타노프의 회포와도 같은 것, 다 함께 일종 고향에 대한 정임에 틀림없다.

‘구라파가 원이오? 그야 카테리나 같은 여자도 많지요. 물론 카테리나는 여기 꼭 한 사람밖에는 없지만.’

스타노프는 카테리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려는 듯 그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웃는다.

‘고향 타령은 왜 이리들 해요. 그렇지 않아도……”

아닌 때 무시로 고향 생각을 되풀이하는 것이 카테리나에게는 도리어 서글픈 노릇인 모양이었다. 외국에서 고향을 말함은 금물이라는 어조이다.

‘나는 지금 내 고향 속에 살면서도 또 다른 곳에 고향이 있으려니만 생각되는 건 웬일인지 모르겠소.’”



1.

삼 년만에 이효석문학관을 다시 찾았더니 전에는 없던 사진 몇 점이 입구 쪽에 붙어 있다. 1920년대의 하얼빈 풍경을 담은 사진들로, 하얼빈 역이나 거리 곳곳에 붙은 표지판에는 한문과 키릴 알파벳이 병기되어 있다. 이효석—<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바로 그 작가—이 만주 생활을 여러 해 했으며, 하얼빈 등을 배경으로 한 작품도 여러 편 쓴 바 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 구색을 맞추어 기념해둔 것이다. (문학관 전시품의 대부분은 메밀의 유래 및 활용이라든지, 봉평장의 역사 같은 것을 설명하는 책자나 사진, 민속 물품 같은 것이다. 이효석이 생전에 수집했던 서책들도 여러 권 있다.) 기획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단촐함이지만 나는 익숙한 언어들이 반가웠다.

문학관을 나오며 기념품점에 들러 양장으로 된 이효석 단편 전집을 샀다. 책을 펼치니 카테리나와 이리나와 빅토르 같은 익숙한 이름들이 책장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2.

한국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해 본 적이 없는지라, 학계에서 이효석이나 백석 같은 작가의 세계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다루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다만 한국 문학의 세계화는—제발 여기서 한강을 운운하지 않기로 하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성공은 일본 문학의 성공이 아닌 것이다—먼저 국문학 내의 세계성이 먼저 발굴되고 조명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일개 개인을 둘러싼 좁은 세상에서 모아들인 파편을 엮어 내어 세계를 상상하고 담아내는 것이 이효석의 (그리고 만주를 오갔을 그 시대 많은 문인들의) 세계문학이었다. 세르비안 쇼의, 저마다 기구한 팔자를 지닌, 나라 잃은 고아 같은 예술인들과 교류하고, “남쪽 고을 알제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맨스 영화의 홍보용 포스터를 그리며 그 주연 여배우와의 연애를 꿈꾸는 것, 파데레프스키의 미뉴에트를 통해 폴란드의 슬픔을 논하는 것. “그런 것들을 들을 때 나는 내 좁던 마음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짐을 깨닫게 되면서 모르던 정회를 그들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개인이 어떻게 세계를 만나게 되는지, 그 개인은 어떤 세계의 일부인지를 생각하지 않고는 세계문학을 논할 수 없다. 언어와 의사소통의 문제 역시 빠질 수 없으며, 언어장벽을 넘어 이루어지는 대화—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를 통해 인간성이 무엇인지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여수>의 화자 “김”은 고향을 꿈꾼다. 고향에 살면서 그가 꿈꾸는 근원지 같은 고향은 뜻밖에도 한 번 밟아 본 적도 없는 구라파다. ‘마담 보바리’와 같은 촌구석 몽상가의, 또는 J. M. 쿳시[Coetzee]가 한 차례 신랄하게 논평한 바 있는 T. S. 엘리엇의 변두리 지식인의 그것과 같은,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허깨비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다. (어쩌면 백석의 나타샤도 그러한 감수성의 산물일 수 있다. 함경도 눈 내리는 산골의 마가리와 나타샤. 식민지 조선의 쓸쓸한 극장에 내려온 천사 카테리나와 닮지 않았는가.) 그 구라파에 대한 동경을 반영하는 욕망의 대상이 바로 서양 여자 카테리나—여배우 미레이유 발랭, 그러니까 ‘김’이 동경해 마지않으나, 어쩐 일인지 쉬이 그림으로 담아낼 수 없는 그 존재를 닮은—다. 발랭과의 연애가 허상이듯, 그 모든 동경도 사실 바람이 불면 풀썩 꺼져 버릴 허상임을 화자도 내심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이 ‘김’이 꿈꾸고 경험하고 상상하는 세계이다. 동시에 카타리나와 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다. 머나먼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는 여자와, 고향이 타향처럼 낯설어져 버린 남자. 그 낯섦의 정서는 아마 식민화와도 관계가 없지 않겠으나, 이미 내 말처럼 익숙해진—이효석은 일어로도 작품활동을 했으니—이국의 말은 역으로 고향처럼 익숙해진 타향 같은 것이다. 모국어를 재료로, 언어로 사용할 줄 알던 사람들은 대개는 다른 언어를 거쳐 모국어로 회귀한 이들이다. 그 역설적 회향 없이 자연스러움은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언어를 언어로, 소중하고 특별한 그 무엇으로 다루는 자세는 아마도 없지 않을까 한다.


3.

결국은 모든 것이 사랑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다. 페넬로페가 이타카이고, 칼립소가 여행자의 기억을 앗아 그에게 새 고향이 되고자 하듯이. 존재하지 않는 고향에 대한 바람은 다분히 이상향적 상상[utopian imagination]과 겹치며, 그래서 세계문학에 대한 상상 또한 언제나 이상향에 대한 것이다.


4.

여기서 메밀꽃 필 무렵을 다시 생각해 보자.

허 생원의 고향은 청주이나, 그 마음의 고향은 못난 인물과 역마 탓에 계집 운이라곤 지지리도 없는 그가 단 한 번, 단 하룻밤을 함께한 그 처녀의 고향인 봉평이다. 덕분에 그는 규모도 하잘 것 없어 벌이도 시원치 않은 봉평장을 고향처럼 장돌림마다 들러 간다. 처녀를 만난 밤도 꼭 이런 달밤이었노라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허 생원 앞에 수십 년 전 그 밤의 정경이, 그 시간이 다시 펼쳐진다. 작중 묘사되는 달밤이 마치 살아 있는 동물의 몸처럼 관능적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마음의 고향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상적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

그래서 '김'은 문명이 활짝 꽃피던 시절의 구라파를 동경하며, 허 생원은 그 단 하룻밤을 추억하며 모종의 의식[儀式]이기라도 한 듯 봉평장을 순례한다. 노스탤지어의 대상은 한 개인의 생애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는다. 그 세계가, 장돌뱅이가 평생 떠돈 손바닥만한 반도이든, 만주와 구라파와 아메리카까지를 망라하는 상상의 세계이든,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런 점에서 세르비아의 카테리나는 봉평의 처녀와 닮아 있다.


5.

평창 올림픽을 생각하고, 카프의 동반자 작가를 Dongbanja Jakga라고 음역해 둔 문학관 안내문을 보고 실소한 것을 생각하고, 한 작가의 세계를 한반도 메밀의 역사로 가두어 놓은 것을 생각하고,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생각한다.

사실 답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