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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빈집

서울을 떠나고 싶어져 비행기를 앞당길 궁리를 한참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헛일이다.

열대야로 새벽 한두 시가 되어도 잠들기가 어렵다. 때마침 시작된 생리에 온몸이 꿉꿉하고 저리다. 생명을 내보낸 도시가 말라붙은 고치처럼 찢어진 귀퉁이로부터 서걱이며 부서져 나간다.

나는 천장을 보며 너와 함께 보았던, 너와 함께 보지 못한, 너와 함께 볼 수 있었을, 그리고 너와 함께 보지 못했을 영화들을 셈해 보았다.


집은 사람이 떠난다고 함께 떠날 수 없다고, 네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고, 너는 말했다. 나는 왜 우리는 집과 여행자의 관계가 되어야만 했는지를 생각했다. 네 어깨와 가슴팍에 눈믈이 그렁하게 맺힌 속눈썹을 닦고 싶었다. 

나는 울기를 잘 했고 너는 울리기도 달래기도 잘 했다.

네가 두고 간 책 한 권 한 권이 손이 되어 뺨과 머리와 등을 내려쳤다. 나는 돌로 맞는 사람처럼 몸을 움츠렸다. 어머니에게는 준비가 될 때까지 알리지 않으려 했던 이별이 묵직한 상자 세 개의 모습을 하고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라는 어머니의 말에 나는 화가 치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위로는 늘 이런 식이었다. 기억의 사금파리를 자근자근 신자의 발로 밟는 것. 기억의 프라이버시 -- 다른 어떤 프라이버시조차 -- 를, 사적인 슬픔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것.

어머니는 내 메신저 기록까지도 몰래 읽는 사람이었다. 닫아 둔 기억의 캐비닛을 열고 들추며 내 치부를 발라내어 내 목전에 대고 흔드는 사람.

다음 사랑은 더 비밀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상자를 하나하나 비워냈다. 오래 전에 잊어버린 선물, 담보물이 내게로 돌아와 있었다. 배려 없는 짓이라고 너를 욕하기에는 내 죄가 너무 중했다. 어머니의 위로 아닌 위로를 다 받아내는 것도 설죄의 일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르골과 인형은 막내동생이 잽싸게 자기 방으로 가져갔다 ("헤어졌으면 이것들은 내가 가지는 게 낫겠네"). 인도와 스위스와 러시아에서 사 모은 부엉이들은 어머니가 버려 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부엉이들을 어머니 몰래 화장대에 감췄다.


너를 밀어내니 비로소 김연수의 소설이 읽혔다. 그런 것을 보면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달로 간 코미디언>인지에 그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했고 아무런 이유 없이 이별했다고.

우리는 외로워서 사랑에 빠졌었다. 외로움이 인간 존재의 본질임을 감안하면 우리도 아무 이유 없이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서로를 향해 도망치는 사람들처럼 사랑했다. 청소년기의 나는 유리조각처럼 예민했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네게, 우리 차라리 둘이 훌쩍 떠나 버리지 않을래, 하고 물었었다. 어딘가로 도망가기에는 우리 둘 다 너무 생각이 많았기에 우리는 늘 서로에게로 도망쳤다. 그러다가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면 어딘가로 도망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서로를 소년, 소녀라고 불렀. 나는 언제까지 소녀야, 하고 물으면, 내게는 영원한 소녀야,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많은 것을 함께 먹었고 많은 것을 함께 보았다. 내가 그림을 보고 영화를 보는 동안 너는 나를 보았다.


나도 너를 보았다.

내가 주문할 음식을 고르면 네가 그래, 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것.

이전에, 네가 나를 보러 처음 바다를 건넜을 때, 아마도 손바닥만했을 먹구름 한 장이, 건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책을 하던 우리를 따라다니던 것과, 날이 견딜 수 없게 추우면 늘 네 외투에 폭 파묻힐 수 있었던 것과. 

네가 팬에 아스파라거스를 익혀 주었던 것과.

네 어깨가 늘 살짝 구부정했던 것과.

비트와 바이트로 된 우리의 사랑고백이 허공을 수백만 번 오갔을 것과.

네가 내가 건넨 네 개의 꽃다발이 튤립, 안개꽃, 다시 튤립, 그리고 프리지아와 국화 순서였다는 것과.

너를 마지막으로 본 날, 네가 땅바닥에 우산을 내던진 것과.

너를 떠나 내가 행복할 거라고 네가 끝내 믿지 못한 것과.


"어제 꽃을 받았는데, 누가 그걸 보고 묻더라. 제일 좋아한다는 꽃이 튤립 아니었냐고.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그 사람한테 예전에, 튤립이 제일 좋다고 말한 적이 있어. 튤립을 보면 네가 생각났거든.

답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답을 웬일인지 선 못 하겠더라. 튤립이 싫어진 건 아냐. 예쁜 꽃이잖아. 화분에 심겨 있으면 정말 예쁘지. 좋아하는 꽃들 중 하나라고까지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튤립을 내가 정말 그렇게 제일 좋아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화분에 심어 놓으면 예쁘다는 대답이 이상한 대답이었나봐. 물어본 사람이 막 웃더라.

나는 왜 튤립을 제일 좋아한다고 생각했을까. 어제 받은 장미들도 참 예뻤는데. 심지어는 나는 장미는 예쁘지 않다고까지 생각했었어. 너무 모두들 주고받으니까. 튤립은 특별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거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