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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에 대하여 버스를 타고 독일 땅을 달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함부르크에서 뮌헨은 아마도 독일 국내에서는 가장 긴 버스 노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된다. 직선으로 달려주면 좋겠지만 버스도 수익을 내야하기에 중간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도시에 정차한다. 덕분에 버스 정류장만큼은 질리도록 보았다. 독일은 철도가 발달한 나라다보니 버스 터미널이 잘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냥 허허벌판에 표지판이나 몇 개 세워둔 곳들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뮌헨 같으면 대도시다보니 조금은 터미널 느낌이 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역시 어딜 가나 독일 도시를 연결하는 점들이 되는 건 기차 중앙역들이다. 함부르크에서 뮌헨으로 돌아오던 날 나는 대낮에 버스를 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침 9시 정도에 타서 밤 9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독일의.. 더보기
(쓰는 중) 액트 오브 킬링 액트 오브 킬링 (2014) The Act of Killing 9감독조슈아 오펜하이머출연안와르 콩고, 헤르만 코토, 시암술 아리핀, 하지 아니프, 사크햔 아스마라정보다큐멘터리 |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 스웨덴, 핀란드 | 159 분 | 2014-11-20 모 선배의 요청으로 작성하는 해설 및 리뷰입니다.사실 제가 영화평론 전공도 아니고, 모국어로는 학술적 글쓰기를 해본 경험이 없어 (본문은, 하고 시작하는 류의 것이요) 썩 유려한 문장은 쓰지 못할 듯 합니다만, 영화를 보고는 그러지 않아도 비망록 겸하여 몇 줄 적어야겠다 생각하던 차라 간단히 적습니다.일단 줄거리를 요약해야겠습니다만, 그 문제야 역시 제작자들 본인의 설명이 가장 간결하지 않겠습니까. In THE ACT OF KILLING, direc.. 더보기
앞치마에 대하여 (생각들 하시는 그 앞치마가 맞습니다.) 앞치마에 대하여나는 앞치마를 좋아한다. 내가 그걸 입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반대 경우를 좋아한다. 앞치마를 입은 몸매가 가장 완만한 곡선만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좋다. 앞치마는 가능하면 흰색보다는 색깔 있는 무지 천으로 된 것이었으면 좋겠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고등학교 때 읽은 권지예의 단편 때문이다.그때 밖에서 남자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도마질 소리도 들려왔다. 제법 익숙한 솜씨로 리드미컬하게 오이 같은 걸 써는 경쾌한 소리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알몸에 초록색 에이프런울 두른 뒷모습으로 싱크대 앞에 서 있다. 무언가에 굉장히 몰두하고 있다. 올라간 그의 어깨 근육과 질끈 묶은 에이프런 끈 밑에 드러난 알궁둥이가 .. 더보기
무의미의 -- 소네트 식 불균형의 산문 가끔 맞춤법을 지켜 적기조차 버겁도록 모든 것의 인과관계와 당위성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다. 가끔이라 하기에도 스스로 좀 쑥스러운 것은 그 가끔이라 하는 것이 사실 매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이렇게 밝혀 쓰기에도 사실은 좀 쑥스러운 것은 부조리란 다름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포스트콜로니얼을 논하며 셰익스피어를 읽는 내가 한심스러우나, 또 한편 요즈음 잘 나간다는 '우리말' -- 그 우리말이란 것도 과연 누구의 말인가 -- 그래서 나는 시나 소설에서 방언이 그럴듯하게 구현된 것을 퍽 좋아한다 -- 장편 한두 권을 서점에서 넘겨 보며 예술성이란 절대적인 것인지 나의 뇌란 것이 제국주의의 美感에 찌들어 버린 것인지를 고민한다.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도 문장에 한자가 태반인 것을 보면 결.. 더보기
잘 모르겠다. 연희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나 더듬거리며 기생을 부른다 이름을 시대가 기억할테니 한 곡 청해 봄이 어떠한가 어찌 그것이 죄가 되오리까 다만 한바탕 놀고나면 목이 우수수 떨어지오 풀로 붙여줄 터이니 걱정마오 위증즐가 태평성대 선을 한번 넘으니 옷을 벗는구나 선을 두번 넘으니 높이 오르는구나 머리채를 흔들며 깡총깡총 연기가 자욱하니 상서롭소이다 머리가 베인 자리가 수릿날 아침 이슬처럼 시원한데 사이다 한 잔 안 주시리이까 입가에 빨간 치킨 양념을 묻히고 기어보너라 자고로 한신은 가랑이놈이라 하였소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을 보여드리리다 내 오늘이 마지막 잔칫날이니 죽은 비렁뱅이들 불러모아 놀아보겠소 흰 피를 뿌리고 죽은 내 딸아 불타죽은 내 아들아 저기 저 상자를 보너라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파란.. 더보기
검은 두루마기와 글 검은 두루마기와 글 엊그제 모 모임에서 나눈 대화 중, 제일 부럽다 여겨지는 사람이 누구냐 묻기에 나는 생각 없는 사람이 부럽다 하였는데, 아닌 것이 아니라 요즘 생각이 없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네 생각만 하기에도 일생이 부족할 것 같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차 정신을 차리고는 할 일을 한동안 하고, 쉬고 싶을 때는 다시 입 안에 알사탕 하나 문 것을 하염없이 혀로 쓰다듬고 굴려 보듯이 머릿속으로 너와 네 목소리를 팽이처럼 돌려 본다. 좀 있다 다시 자기소개서를 쓰러 갈 적에는 -- 나 자신을 어떻게든 광고해서 어느 대학에라도 팔아야 할 것인데 그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 그 팽이를 다시 주워 호주머니에 넣을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오늘 생리통으로 종일 .. 더보기
새롭고 영원한 계약 한때는 기억을 고등정신작용의 일환이라고 믿었고, 어느 시절인가에는 손으로 쓰여지는 것들만이 올바른 기억이라고 주장했고, 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힘들이 그리는 지형도가 기억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과거의 나와 결별하려고 할 수록 그 반동으로 인해 자꾸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 요새는 점점 힘이 부친다. 그래도 힘을 내어 다시 한 번 부정해보자면 기억은 피로 쓰이는 것이다. 유혈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나도 편리하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런 이야기는 대체로 담대한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법이다.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기억에 대한 소박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망각의 장소를 찾아가고 싶은 사람의 도피적인 언설에 불과하다. 기억이 어디에 축적되는지에 대해서는 .. 더보기
대화 요는, 연애하시라고요 여러분. 이러다 또 잘 안 되면 다 부질 없다는 요지로 또 글을 쓰겠지만. 만약에. 응. 만약에 오늘 같이 자면 내일도 내가 좋을까? 응. 그러다가 질리면. 그럼 같이 할 수 있는 좋은 걸 또 찾으면 되지. 우리나라에서 이상하게 성적인 걸 맨 마지막 단계인 양 포장해서 그렇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그렇게 단편적인 문제는 아냐.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인데? 그래도. 오늘 자도 내일도 좋고 내일 자도 모레도 좋을 거야. 그러다 질려도 좋아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럴 만큼 좋은가 보네, 내가. 그렇게 안 좋았으면 뭐 하러 그 맘 고생을 하면서 잡아 왔겠냐? … 어차피 내가 보기엔, 네가 질려서 내가 떠날 확률보다도 네가 나를 뻥 차고 떠날 가능성이 몇 배는 높거든. .. 더보기
너와 나의 바벨 -- 블레이크의 신화에 비추어 제니퍼 슈츠는 "So Nakedly Dressed"에서, 여성의 몸을 묘사를 통해 재구성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슈츠는 롤랑 바르트의 S/Z를 이론적 기반 삼아 나보코프의 와 두 소설을 논하는데, 묘사를 하려면 무언가를 끊임없이 나열해야 하는 언어의 특성상, 묘사의 대상이 되는 어떤 신체는 조각나게 될 수밖에 없다. 독자에게, 그 아름다운 신체를 온전히 제시하기 위해, 묘사자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나열할 수밖에 없게 되고, 열거되는 목록이 길어질수록 신체의 파편화는 심화된다. 종내, 그 신체에 대응하는 어떤 개인 -- 아다, 그리고 롤리타 -- 은 그 묘사로부터 점점 유리되며, 묘사를 통해 애인을 소유하고자 했던 서술자는 종내 한 무더기의 조각난 신체와 함께 홀로 남겨진다. 다시 말해, 너의 침은 너.. 더보기
에라이 XX XX X하니 XX이 XX? 의미부를 전부 검열처리해버렸다. 검열 당하니 기분이 어때? 식민지 조선의 소설을 읽다 보면 뜬금없이 XX가 튀어나온다. 다행히도 식민 통치를 벗어난 한국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XX에 들어갈 만한 내용을 추측하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원래의 텍스트가 어떠했는가를 상상하고 끼워맞추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XX로 떡칠된 바로 그 텍스트를 존중하는 일이다. 사상 통치 기제가 일상적 텍스트의 영역까지 침범하던 시절이 낳은 텍스트. 분명히 XX가 아니더라도 작가들은 이미 한 차례 자기검열을 거쳐서 글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게다가 김동인의 회고에 따르면 검열관과 작가 사이에도 모종의 관계가 존재했다. 검열을 하나의 원텍스트를 둘러싼 상호작용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반복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