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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고도 쓸 수 있다면 딱딱한 글을 쓰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문장은 50자를 넘어가면 안 될 것 같고, 문단은 반드시 나뉘어야 하며, 각 문단별 소주제가 확실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규칙을 지키다보면 글은 놀라울 정도로 재미없어진다. 그것은 읽는 이가 어떠한 반전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다음에는 무슨 문장이 나올지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생각만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생각을 벗어난 세계의 논리는 어렵다. 그 세계에는 생각으로 해결가능한 논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조직된 논리가 작동한다.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까닭은, 그 세계가 비록 이성적이지는 않아도 그 자체의 충분한 논리를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감성의 논리, 영성의 논리. 마음과 영혼. 육신과 정신. 하늘과 땅. 영화 의 주인공은 위.. 더보기
[10분간 글쓰기] 욕망의 유예 문득 떠오른 주제를 가지고, 오직 10분만의 시간을 가지고, 그냥 이 키보드와 나 둘이서만 글을 써보기로 했다. 습관처럼 하던 페이스북, 잡념, 검색 엔진 모두 안녕. 옛날 글을 쓸 환경이 되었을 사람들에게도 방해 요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길거리를 달리는 마차의 방울소리라든지, 유난히도 시끄러운 유모의 기침소리라든지.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유혹이 될 만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여분이 너무 큰 나머지 본질을 침해한다. 나는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 단 10분간의 유예를 허락하기로 했다. 이것은 유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으로부터, 나를 둘러싼 공기로부터, XX으로부터. 결코 해방이 아닌 유예. 유예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얼마든 처할 수 있는 하나의 '상황'이다. 아무리 마음을 가볍게 먹은.. 더보기
금식 기간 동물들은 다치면 금식을 한다고 한다. 그럴 듯 한가? '한다고 한다.' 당초 동물들의 금식에 관해 관심이 생겨 검색을 해보니,(얼마나 편리하고도 신뢰성 떨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동물들의 금식은 마치 관용구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금식을 찬양하는 이들이 왜인지 글머리에 꼭 꺼내는 이야기가 바로 동물들의 금식 이야기였다. 실제로 그들이 강조하려는 것은 금식을 통한 다이어트거나 건강 고양이거나 영적 충만을 추구함이었다. 동물들은 여기에서마저 이용당하는 신세였다.그나마 가장 관련이 있는 내용은 수술 받기 전에 동물들에게 금식을 시켜야한다는 것.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통용되는 상식이니 그냥 넘어갔다. 외국 웹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google에 animal fasting이라고 쳤더니 animal t.. 더보기
과거 완료, 패스트 퍼펙트 과거 완료, 패스트 퍼펙트 (며칠에 나누어 여러 문단씩 쓴 글이라 어느 문단의 어제가 어느 날인지 알 길이 없다. 삶은 요일에서 비끄러져 나와 어제와 오늘과 내일, 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다.) 1. 목요일이 추석이라는 걸 문득 깨닫고 명절 음식을 해 볼 생각을 한다. 추석 음식은 무엇이 있는지도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검색을 해 보니 토란탕, 송편 같은 것이 나온다. 나는 엉뚱하게도 김밥을 싸고 만두를 빚고 싶다. P에게도 시간이 맞는다면 먹여 볼 생각이니 아마 햄이나 다진 돼지고기니 하는 것은 죄 빼고 두부와 버섯, 다진 김치와 부추 등속을 잔뜩 넣어야 할 것이다. 어제는 파머스 마켓에 다녀와, 블루치즈와 피칸을 넣어 스콘을 열두 개 구워 내고 -- 직사각형의 반죽을 밀가루를 묻힌 칼로 우선 여섯 개.. 더보기
未開 학교 생각을 하면, 사실 중학교 생각은 거의 나질 않는다. 이미 지나간 지 오래되어서 내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취사선택된 장면들만 가지런히 떠오를 뿐이다. 오히려 전혀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다가 관련된 사건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둥그러니 떠오를 때가 있다. 이 시를 쓸 때 나는 중학교 생활을 하며 받았던 느낌을 살리려고 했지만 막상 떠오르는 건 고등학생 때의 시간이었다. 아무런 일도 없이(그러나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지나간 듯 장면들조차 갈무리되지 않은 고등학교의 나날이 내겐 더 가까운 학교의 이미지다. 그 시절, 무지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未開 안개를 밟고 학교에 오를 때면언덕이 힘껏 종을 쳤다 뎅겅 고개 숙인 명찰의 돌출빤히 그것을 응시하는 취미 아침마다 청소를 하면 깨끗하다마치 표백된 파랑새.. 더보기
맨발로 길을 건너던 맨발로 길을 건너던 파티에 남자친구를 데려가, 동기들에게, 선후배들에게 소개를 이럭저럭 해 주게 되었다. 남자친구의 친구들은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다 만나 보았던 터라, 어젯밤으로 대충 인간관계망의 평형은 맞췄다. 같은 자기소개를 십수 번 듣고 ("안녕, 난 P야. 재키랑 같이 왔어." "너도 H대 학생이야?" "아니, 난 M 공대."), 겨울쯤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남미 출신 친구들에게 초대도 받고, 이런저런 놀림도 당하고 ("지난 2주 동안 네가 밥을 다 했으면 재키는 아무것도 안 한 거야?" "아냐, 어제 저녁의 블론드 브라우니는 재키가 그래도 반쯤 만들었어."), 터무니없는 양의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내가 지독히 싫어하는 유명한 교수 하나에 대해 험담을 한참 하고 나니 자.. 더보기
피로가 묻어있는 생활관. 즉 집단 거주 시설. 복도는 쭉쭉 뻗어나가고 가지를 쳐 나가듯 방들이 복도에 매달려있다. 폐포가 폐 혈관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모양 같다. 부지런히 숨을 쉬는 가련한 생명들이, 대체로 누워서 혹은 어쩌다가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다. 이곳의 생활은 어떤 생활일까. 철저하다기보다는 처절한 생활, 매 순간 생과 활의 의미를 잃어가면서도 생과 활의 현재를 뼈에 사무치게 느끼는 생활이다. 그래, 하지만 이것은 종을 위한 헌신이다. 꿀벌들에게 집이 갖는 의미가 아마 비슷할 것이다.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꿀벌들이 집에 대해 낭만적인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수백 km를 떨어진 곳에서도 벌집으로 돌아올 수 있고, 벌집이 공격받으면 개개인의 목숨을 버려 전체를 구.. 더보기
욕심의 반비례 욕심의 반비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지만 아니기도 한 -- 세상의 모든 국제연애자들, 모든 '세계의 끝 여자친구'들을 위해. (사실 옛날 사람들은 은하 같은 강을 건너면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알았고, 고인 같은 애인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경으로 오작교를 하늘에 지었을지도 모르죠. 비행기가 생기고 비디오채팅이 생겼다고 사람 사는 것이 그리 다를까요.) -- "누가 보아도 나더러 읽으라고 내놓은 글이라 거듭거듭 읽었거든요.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런 글은 잘 썼고 못 썼고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기보다는 그냥 자기에 대해서 쓴 글이라서 괜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라데요. 아마 그 말이 맞을 거예요. 잘 쓴 글이라는 게 결국 나에게 말을 거는 글이니까요. 사적인.. 더보기
[짧은 글] 삶 편향 우리의 이야기에는 삶에 대한 편향이 있다. 불가피한 경사(傾斜)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있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도 이미 삶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산 자들이 이야기하는 죽음과, 죽은 자들이 이야기하는 죽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버린 작가 한강의 최근작 는 삶에 대한 편향을 벗어버린 글이었다. 살아있는 자만이, 아니면 유령처럼 준-살아있는 존재만이 발화하고 행동하고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대신에 죽은 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영화 도 그러했다. '경주'는 무덤이 되어버린 도시다. (실제 대한민국 경주시에 사는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한 발언이지만, 최소한 영화 속 '경주'는 그런 곳이었으니 양해 .. 더보기
헌 글의 자리? 새 글의 자리라고 되어있는 폐허를 발견했다. 매음굴에 간 거친 남자처럼 나는 다급해졌다. 대체 어디로 들어가야 글을 쓸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는 이 블로그에 빨리 글을 남기고 싶어졌다. 내가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이용해 글쓰기 창에 들어오고 나니 되레 마음은 차분하니 뭔가 술술 써낼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지금은 인터넷 강의를 듣던 중. 글쓰기의 매혹에 미쳐서 인강 창을 닫아버리고 이 미친 백지를 바라보고 있다. 하얀 색 창을 산산히 깨버리고, 찢어발겨서 하늘에 휘휘 날리고, 불그죽죽한 물감으로 더럽히고 싶다. 더러운 폭력의 욕구가 목구멍 너머에 치밀고 있다. 이 사악한 강제력을 화면에 행사한다. 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사용을 중지한 외교 공관이 더 이상 외교 공관이 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