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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글의 자리(Side B)

헌 글의 자리?

새 글의 자리라고 되어있는 폐허를 발견했다. 매음굴에 간 거친 남자처럼 나는 다급해졌다. 대체 어디로 들어가야 글을 쓸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는 이 블로그에 빨리 글을 남기고 싶어졌다. 내가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이용해 글쓰기 창에 들어오고 나니 되레 마음은 차분하니 뭔가 술술 써낼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지금은 인터넷 강의를 듣던 중. 글쓰기의 매혹에 미쳐서 인강 창을 닫아버리고 이 미친 백지를 바라보고 있다. 하얀 색 창을 산산히 깨버리고, 찢어발겨서 하늘에 휘휘 날리고, 불그죽죽한 물감으로 더럽히고 싶다. 더러운 폭력의 욕구가 목구멍 너머에 치밀고 있다. 이 사악한 강제력을 화면에 행사한다.


<배설>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사용을 중지한 외교 공관이 더 이상 외교 공관이 아니라는 국제법상의 판례'와는 달리 이곳은 폐허로서 더욱 빛난다. 도시에서 흔히 그렇듯 폐허는 그렇게 끝장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 어둠 속에서만 빛을 낼 줄 아는 것들이 들어와 알을 품고 새끼를 까고 사는, 그런 공간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고독한 척하지만 밤에는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셰헤라자드들이 몰려있는 일종의 하ㄹ렘이다.


그렇담 '새 글의 자리'란 이름도 때려쳐야만 하나. 아니다. Новгород(현재는 Вели́кий Но́вгород)가 이름은 '새 도시'이되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중세 러시아 국가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수도였다면 어떤가. 역설적으로 너무나 오래되었기에 새롭다는 이름을 감히 쓸 수 있는 것이다. 그 옛날에는 아무 것도 없어서, 노브고로드가 새로운 도시였을테니 말이다. 그러니 나도 '새 글의 자리'를 깔고 뭉개고 앉아서 엉덩이에 종기가 날 때까지 써보겠다. 글은 바쁠 수록 쓰는 맛이 난다. 할일이 없어서 쓰는 글에서는 피할 수 없는 고약한 취미의 냄새가 난다. 생활의 끝에서 단 하나의 펜으로 갈겨서 노트에 박는 글자여야 어쩐지 글 같은게, 나야말로 어쩔 수 없는 속물이다.


이 글꼴가 "고딕"이라고 한다. 마침 내가 쓰는 글의 풍토와도 아주 잘 어울린다. (사실 영어로 Gothic font라 함은 소위 "Blackletter"로 독일 2차 대전 선전물을 생각하면 흔히 보이곤 하는 빽빽하고 읽기 어렵지만 왠지 멋있어 보이는 글꼴이다. 동아시아의 고딕체는 영어의 Sans serif체에 가깝다고 한다) 어쩔 줄 모르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고딕 양식과 절망을 짊어진 채 고래고래 난동 피우는 이 글이 다르지 않다. 중세가 끝날 때 사람들은 세상이 망할 줄 알았을까, 아니면 드디어 인간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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