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을 청하는 두 사람의 팔다리에 대한 고찰 A proposal: 누군가에게 안긴 채 잠든다는 것은, 일정 몸집 이상으로 자라난 생명체에게는 다소 불편한 일이다. 사지를 어떻게 엮고, 또는 한쪽으로 접어 치워 둔다 해도, 팔과 다리가 한두 개쯤 남아도는 느낌일 수밖에 -- 전에 아주 잠깐 만났던 누군가는, 이런 느낌의 한 부류를 "t-rex syndrome"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한 팔을 뻗어 상대를 감싼다면 다른 팔은 두 몸 사이의 간격에 맞추어 움츠릴 수밖에 없다는 것. -- 없다. 그것은 비단 팔뿐만 아니라 다리에, 또 가끔은 목과 머리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과 우로보로스의 차이는 인간의 팔다리에 있다고 말했다. 둥근 우로보로스가 그 자체로 완전한 우주의 형태라면, 인간의 팔다리는 -- 다소 우아하지 못한 모양새로 -.. 더보기
결혼 이야기 어쩌다 보니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연애를 하다 보면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 모양이다.)심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이 사람과 결혼하면 어떨까, 하고 둘 다, 생각을, 종종, 한다는 것. - 혹시 저번에 아기 생길 뻔 했던 일 때문에 생각해 본 거야? -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을 한 지 좀 됐어. 내일 프로포즈를 하고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놀란 표정 안 지어도 돼. - 내일이라도 아마 예스를 할지도 몰라. Because I really like you, and I can try to be a better person for you. - I don't want a better you, though. I like you as you are.풀리지도 않을 연애를 하면서 허구한 날.. 더보기
어느 밤 -- 타협과 샤워와 누드 - 작년 이맘때는 내 기분이 날씨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받는 줄 몰랐어. - 캘리포니아엔 날씨가 없어서? - 2월, 3월엔 우울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진짜 힘든 거 있지. 근데 4월이 되니까 바보같이 종일 실실 웃고 다녔었지. - 글쎄, 4월엔 아마 다른 누군가의 영향이 있었던 것도 같고. - 세상에.- 왜 때려?- 좋아서. -- T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단다. 현재 비행기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도시에 사는 남자친구 -- 그를 일단 H라고 부르기로 하자 -- 오는 가을에 T와 네가 사는 도시로 이사를 오기로 되어 있었다. 오는 가을, 이라고 하는 것도 T가 몇 차례의 유예를 준 끝에 -- "작년 이맘 때는 가을에 온다고 하더니, 가을이 막상 되니까 지금 직장에서 일 년 단위를 꽉.. 더보기
온도적정 북쪽 하늘을 면한 작은 방, 옥탑은 아니되 가장 모서리의 방, 그러니까 가장 날카로운 방. 하늘을 찢고 들어가는 방에서 5년이 지났다. 그 중 3년은 방에서 살지 않았으니 아직 낯설다. 여전히 방에서는 잠만 잔다. 날이 가도 밤은 항상 추웠고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독일어에서 말하는 'Es zieht'(직역하면 It pulls)가 바로 이렇게 외풍이 들어오는 상황이다. 누가 무엇을 당기고 있길래 바람은 쉴새 없이 스며드는가. 와류는 구석에 몰린 채 언제든 벗어날 기회만을 노렸다. 겨울바다를 꿈꾸는 것들이 허공에서 헤엄치다가 따뜻한 곳에 끌려 옹기종기 모였다. 공중을 헤엄치는 상상, 아주 오래된 류의 상상이지만 해본지도 오래된 상상이다. 공기는 충분한 부력을 제공하지 못하고 중력의 눈은 매섭다. 어찌하여 .. 더보기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우리, 를 생각하기가 어렵다. 너와 내가 만나면 우리가 된다고는 하지만, 1인칭 복수라는 것은 애매한 이야기다. 감히 우리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보라 때문에 너는 C의 집에서 주말을 보낸다. 거의 비어 갈 고양이의 물 그릇이 눈에 밟히지만 C가 끓이는 양파 수프 냄새도, 침대도 거역할 수 없이 따뜻한 탓에 너는 네 자신이 고양이인 양 C의 방과 주방을 오가며 -- 이따끔 기지개를 켜고, 20분 정도 낮잠을 자기도 하고, C가 만들어 놓은 음식들을 한두 점씩 집어 먹고, C의 룸메이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 주말 내내 노닌다. - 나 주말 내내 이렇게 있어도 괜찮아? - 네가 좋고, 주말을 너랑 보내는 것도 좋아. - 그럼 다행이야. 우리는 이렇다,.. 더보기
금연애를 해본다면 금연애를 해본다면 슈퍼볼 중계를 아메리칸 뽀-이 일곱 명과 함께 보았다. 다가오는 발표 때문인지 C는 다소 압력을 받고 있는 눈치다. 토요일 밤 그 압력을 온몸으로 다 받아낸 너는 화장을 지울 기운도 없어 C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묻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느릿느릿 둘 다 눈을 떴을 때는 -- "Morning, handsome." "Morning." "What time is it?" "Eleven." "What?!" "Yeah, I thought it'd be, like, nine." "How'd this happen?" -- 해가 이미 중천이다. 피로 때문인지 전날 먹은 짠 음식 때문인지 눈꺼풀이 잔뜩 부어 있는데, 쌍꺼풀이라는 개념조차 잘 모르는 C는 아마 -- "너 오늘따라 되게 예쁜데 왠지는 모르겠.. 더보기
잡글 -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시도 1. 신, 혹은 자연. 하나의 실체를 허용하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오직 단 하나만이 있고, 우리 모두 그 안에 있다. 만물은 곧 신이며, 단 하나의 실체다. 존재에 피곤함을 느껴왔던 내겐 정말로 반가웠던 주장이었다.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도 무겁다. 그러나 이러한 피곤은 생각해보면, 결국 비-존재가 있기에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나의 존재는 끝난다. 점점 이 존재는 끝을 향해가고,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마치 마모되는 톱니바퀴처럼, 그렇기에 나의 수레바퀴도 점점 굴러가고, 천천히 굴러가며, 언젠가 멈출 예정이기에 나에게 한 없이 피곤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단 하나의 실체, 단 하나의 존재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외엔 아무.. 더보기
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를해야한다 (Feat. Privilege of Being, by Robert Hass) 0. - 언니는 평생 인터넷 없이 사는 거랑 평생 연애 안 하는 것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뭘 택할 거야. - 연애 안 하면 나 죽어. 난 죽을 때까지 연애를 할 거야. 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를해야한다. 연애는 나의 형이상학. 필멸의 시간 속에서 불멸의 환상은 가히 꿀맛이다. 사실 오비드의 은 필멸과 불멸 사이의 음담패설이다. 죽지도 늙지도 않기에 하루 종일 섹스를 하거나 질투를 하거나 섹스와 질투의 후환을 열심히 처리하는 -- 열심히 똥을 치우는 -- 신들과, 인간처럼 자신의 필멸성[mortality]에 항시 자각하고 있지 않기에 신들과 진배없이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필멸자이지만 불멸의 싸이키[psyche]를 지닌 축생들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판타지. 냐하항. 1. - 우리 엄마가 너 맘에 .. 더보기
음담패설에 대해 음담패설에 대해 음담패설을 하지 않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섹스에 대한 얘기가 더 이상 야한 얘기가 아니게 된 지금은 아마 음담패설이라는 것 자체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유희에 대한 염원을 담아 음담패설의 정의와 기능과 문맥을 탐구해 보기로 한다. 음담패설[淫談悖說]은 '음탕하고 덕의에 벗어나는 상스러운 이야기'를 뜻한단다. 요컨대 그것은, 상상 속 어떤 청자가 그것이 '덕의'에 어긋난다고 판단할 법한 이야기여야 하며, 음담패설의 즐거움 중 상당한 부분이 그 도덕적 금기성에서 우러나온다. 그 이야기는 또한 음탕해야 한다. 즉, 화자와 청자의 생각에 모두 음란하고 방탕한 이야기 -- 일종의 일탈의 의미마저도 담겼다고 볼 수 있는 -- 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저 정의에는 한 가지 문.. 더보기
삶과 삶의 조우 삶과 삶의 조우 절필도 금주도 가족여행 덕에 실패다. 블랙러시안을 만들어 마시려다가 깔루아 값을 보고 포기한다. 보드카에 진저에일을 섞어 들이킨다. 물에 물을 섞은 듯 싱겁다. C에 대한 동생의 첫인상은, 그러니까 --"와, 난 나보다 머리 큰 사람 처음 보는 것 같아."하 참 나. -- 먹을 것 천지인 퀸시 마켓까지 구경을 가서도 네 식구들은 끝끝내 시장 맞은편의, 네 생각으로는 턱없이 비싼 (김치볶음밥에 17달러라!) 한식당으로 향했다. 통역과 주문을 위해 벽 쪽 대신 홀과 가까운 구석에 앉아 너는 웨이트리스에게 주문을 넣었다. 김치볶음밥 세 개, 돌솥비빔밥 하나. 싫다는 너의 만류에도 네 접시에 어머니는 비빔밥을 다섯 숟가락이나 덜어 준다. 밥을 젓가락으로 입 안에 깨작깨작 밀어넣으니 익숙한, 고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