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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비가 그치듯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삶과 삶의 조우

삶과 삶의 조우


절필도 금주도 가족여행 덕에 실패다. 블랙러시안을 만들어 마시려다가 깔루아 값을 보고 포기한다. 보드카에 진저에일을 섞어 들이킨다. 물에 물을 섞은 듯 싱겁다.

C에 대한 동생의 첫인상은, 그러니까 --

"와, 난 나보다 머리 큰 사람 처음 보는 것 같아."

하 참 나.


--


먹을 것 천지인 퀸시 마켓까지 구경을 가서도 네 식구들은 끝끝내 시장 맞은편의, 네 생각으로는 턱없이 비싼 (김치볶음밥에 17달러라!) 한식당으로 향했다. 통역과 주문을 위해 벽 쪽 대신 홀과 가까운 구석에 앉아 너는 웨이트리스에게 주문을 넣었다. 김치볶음밥 세 개, 돌솥비빔밥 하나. 싫다는 너의 만류에도 네 접시에 어머니는 비빔밥을 다섯 숟가락이나 덜어 준다. 밥을 젓가락으로 입 안에 깨작깨작 밀어넣으니 익숙한, 고소하고 꼬릿한 그 냄새 -- 가 입과 비강을 느물느물 덮는다.

불평을 하려다가도 -- 자기가 잘 아는 맛과 감각과 풍경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여행이 다 무슨 소용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네 불만의 주된 내용일 것이다 --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여행을 하며 낯선 것들을 먹어 왔었다. 만 열한 살의 나이에 이스탄불 강가에서 갓 잡아 구운 고등어 케밥을 먹지 않았더라면 -- 몽골에서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보기 전, 저녁으로 양고기의 진한 냄새를 전혀 가리지 못하는 고기만두를 먹지 않았더라면 -- 아마도 지금의 너 역시 낯선 음식과 향기에 혀를 빼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네가 가장 익숙해야 할 맛의 삶이 이미 낯설다. 이따금 순두부와 한국식 치킨이 먹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향수병이 아닌 자본주의적 잡식주의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남미식의, 두껍게 튀긴 옥수수 빵을 사용한 아레파가, 내일은 계란을 풀어 넣은 한국식 만둣국이 먹고 싶은 것도, 그러다가도 막상 그 모든 것을 만들 여력도 예산도 없어 샐러드 믹스에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만으로 드레싱을 해 아침을 해결한다 해도 배가 부르고 나면 그 모든 욕망이 사실은 굉장히 덧없었음을 깨닫는 것도. 


네 어머니는 C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맥주를 즐긴다는 C의 이실직고에도 이튿날까지 네 어머니는 -- "명랑하고 똑똑하고 열심히 사는 친구던데, 아직 미래를 의논하는 사이는 아니라고 했지, 생일도 같다니 이다음에 가족들끼리 함께 축하하면 좋기는 하겠는데, 우리 K는 대한민국의 인재라서 국적이 모호해지면 곤란한데, 참, 이런 말까지 하고 내가 주책이지" -- 김칫국을 연신 들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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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너는 통역을 시작한다.

'쌀'이라는 생각에 리조또를 시키려는 어머니께 너는 매콤한 토마토 그레이비 소스가 든 뇨끼 -- "감자 수제비 같은 거야" -- 를 권한다. 치즈와 허브가 잔뜩 든 -- 대신 고기와 해물이 없는 -- 리조또는 채식주의자인 C가 대신 주문한다. 너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손에 힘이 갑자기 풀릴 경우를 대비해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스테이크를 다져 넣은 샌드위치를 주문한다.

음식은 맛이 좋다. 어머니는 끝내 뇨끼를 다 못 드신 채 함께 나온 프렌치프라이만 케첩에 연거푸 찍어 입에 밀어넣는다.

(하이라이트:

- [한국어]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좀 물어봐 줄래.

- ...

- [영어] 아, 그 질문이야?

- [영어] 응. 표정 보면 보이는구나? 너와 신의 관계는 어떤 걸까. [첫번째의 고의적 오역]

- [영어] 음, 뭐라도 대답을 해야겠지?

- [영어] 응, 대답해 주면 내가 알아서 걸러서 통역할게.

- [영어/ 한국어] 과학을 하다 보니까 세상에 대한 양적인 정보는 많이 수집할 수 있어요. 그런데 목적이나 자연의 경이라는 것은 -- 통계를 아무리 많이 내고, 자연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게 되어도 알 수 없는 것이더군요. 신앙의 역할이 아마 그런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요. 너무 과학자 같은 대답인가요? [고의적 오역 및 필터링]

- [영어] That was a really good answer, thanks.)


Traduttore, traditore.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오며 -- 어머니는 말리아베, C는 마-ㄹ리아ㅂ, 라고 발음할 -- 그들의 자음과 모음은 서로 겹치는 것이 없어 보인다 -- 상호의 그곳 -- 어머니는 C의 목도리를 가리킨다.

- 이거 우리 K가 떠 준 거죠? 딱 봐도 알겠네.

- [통역]

- 아, 이거요? 네, 어떤 예쁜 아가씨가 저 하라고 만들어 줬지 뭐예요. 이렇게 정교한 무늬도 있어요, 한번 보세요.

- 척 보면, 어설픈 게. 우리 K 솜씨야.

- 뭐야, 그렇게 어설퍼?

- 음, 뭐, 색 배합은 예쁘다. 잘 어울린다고 좀 --

- [종합 통역]

- 맘에 안 드신대? 난 진짜 멋있는 것 같은데. 크리스마스 때 식구들한테도 다 자랑했었어.

- [통역]

- 음. 나도 주황색을 좋아한다고 전해 줘.

- [통역]

- 아, 그래요? 맞아요, 사람들이 오렌지색이 얼마나 멋있는 색인지 잘 모르잖아요.


너와 C는 어머니를 숙소까지 배웅한다.

- C는 집에 어떻게 간다니? 너는 C가 도로 데려다주고? 그럼 C는 어느 세월에 집에 가려고. 가방도 굉장히 무거워 보이는데, 아이고 힘들겠다. 날도 추운데.

- 되게 튼튼해.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 대표 수영선수였어. 추위도 안 타고.

- 그래, 그래도. 수고 많았어요.

- [통역]

- 만나서 반가웠어요. 정말 K 말대로 자상하고 잘생기고 똑똑하네. 기도할게요. 얼른 들어가요. 이 애까지 데려다주고 들어가면 너무 늦겠네, 미안해서 어쩌지.



C는 그날 밤을 네 집에서 보낸다.

양치를 하고 방에 돌아오니 C는 이미 스웨터며 청바지며 속옷을 다 벗어 침대 옆으로 던져둔 채다. 손끝에 닿는 C의 몸 곳곳이 따뜻하다. 너는 고양이를 방 밖으로 내놓고 문을 닫는다.


평행우주라 생각했던 삶과 삶이 조우한다.

사실 늘 교차공간이라는 것은 -- 두 언어를 통역하는 일처럼 -- 다른 무엇이 아닌 너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구름까지 갔다가는 되돌아오는 노래들과, 바닷가에 우두커니 멈추어 서 버린 말과 --. 네 닫힌 문에 언제나 너는 기대어 서 있었을 뿐이다.

건너갈 곳이라고는 하늘뿐이었던 고대의 세계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