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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비가 그치듯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우리 헤어지는 연습

우리 헤어지는 연습



우리 언젠가 헤어져야 하잖아요. 헤어지는 연습을 해 봐요.


요즘 - 너는 이상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

이사할 일이 두려워 살림살이 늘리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던 사람이 삶의 부속물을 모아들인다. 중간 크기의, 모교 엠블럼이 찍혀 있는, 머그 하나에 커피도 라면도 오트밀도 케이크도 담아 먹던 네가 종이학 문양이 아로새겨진 예쁜 찻잔 세트에 눈길을 주고 세일 기간을 기다리고, 가구며 주방기구를 사들인다.

또 어딘가로 떠나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이것들을 짊어질지 내버릴지 너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는 불완전한 육체를 보완하기 위한 연장[延長]이라 보아도 좋다. 많은 음식을 몸에 한꺼번에 저장할 수 없기에 외장-위장인 그릇을 만들었고, 포식동물의 송곳니와 발톱이 없었기에 돌을 벼려 도끼와 칼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살림살이라는 건 사실 비대해진 존재의 사지[四指; 死地]와도 같다.


삶에 유착하는 것은 병이다. 적어도 너는 자라나면서 그렇게 배워 왔다. 삶을 온전히 사랑하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되, 그 무엇도 결국 내 것이 아니므로 언제든지 버리고 떠날 준비를 할 것. 삶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과 그것을 또 언제든 버릴 준비를 하라는 것은 모순이라고 너는 늘 생각했으나, 또 이십 년쯤을 그렇게 살다 보면 그런 믿음이 뇌 한구석에 자기도 모르게 이식되는 법이다.

다만 교착하지 않는 삶은 반쯤은 삶이 아니기도 하다. 어느 도시에 가든 그 도시의 음식을 먹고 그 도시의 옷차림을 하고 그 도시의 방식으로 연애쯤도 해낼 수 있겠으나, 그 모든 것들과 너는 늘상 이별 연습을 하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일상의 일부가 되어, 연습의 필요성마저도 잊어버렸을 바로 그 무렵 -- 이별의 서식지다.


나는 아름다운 빛을 사랑한다. 골짜기마다 단풍이 찬란한 만폭동, 앞을 바라보면 걸음이 급하여지고 뒤를 돌아다보면 더 좋은 단풍을 두고 가는 것 같아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예전 우리 유치원 선생님이 주신 색종이 같은 빨간색. 보라. 자주. 초록, 이런 황홀한 색깔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오래된 가구의 마호가니 빛을 좋아한다. 늙어 가는 학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좋아한다.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하기로 해 놓고도 너는 숱하게 고민을 했다.

꼭 저 녀석이면 좋겠다는 C의 말에 점찍어 둔 -- Dabby. Dabby 100%. You must adopt Dabby. Those ears! -- 박쥐처럼 귀가 뾰족하고 큰 고양이는 약간의 만성 건강 문제가 있어서, 동물병원을 몇 차례 추가로 드나든 끝에야 네 집으로 이사했다. 수의원으로부터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너는 C가 대학을 졸업한 도시에를 다녀왔고, 발제를 두 번 했고, 커피 수십 잔을 들이켰고,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을 지켜보았고, 시국선언에 참여했고, 묘한 탈선을 일으킨 생리 주기 덕분에 지레 겁을 먹고 낙태유도제 처방 비용과 부작용 등을 알아보았다.

내심 너는 고양이를 데려올 수 없게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늙은 고양이를 데려오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하고 너는 어느 밤 곁에 누운 C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말했었다.

- 늙은 고양이?

- 몇 년 있으면 죽잖아, 늙은 고양이는. 나는 내가 몇 년 후에 어디로 갈지 모르는데. 그 동안 같이 행복하면 된 거 아닐까.

- 너 가끔 되게 무서운 말 하는 거 알지, K. 빨리 죽는 고양이가 좋다니. 근데 이해가 돼, 한편으로는.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아무데도 가지 마.

- 나 여기 사는걸.

- Good.

나는 젊은 웃음소리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 없는 방 안에서 내 귀에다 귓속말을 하는 서영이 말소리를 좋아한다. 나는 비 오시는 날 저녁 때 뒷골목 선술집에서 풍기는 불고기 냄새를 좋아한다. 새로운 양서[洋書] 냄새, 털옷 냄새를 좋아한다. 커피 끓이는 냄새, 라일락 짙은 냄새, 국화. 수선화. 소나무의 향기를 좋아한다. 봄 흙냄새를 좋아한다.


글로 옮겨 둔 기억도 언젠가는 유효기간이 지나게 되는 걸까.


You're tasty. The joys of cinnamon squares.

I'm laying on the pillow you used last night, and it smells like you, and I miss you.

Was it worth it? Oh, absolutely. I had a fantastic time.

What do I smell like? Like a lot of different things. Hmmm, vanilla. Cigarettes. Your body wash. Overall a sexy Jackie smell.

Building furniture for you is fulfilling all my masculine urges. I hope you notice. If you have a pickle jar that you were struggling to open, now is your time. Testosterone's flowing through me.

I'm not a cat, you know that, right. You sure?

Mind if I changed into something more comfortable? Go for it. You can see the rest later tonight. ... Yay?


글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영화를 보다가 수학자와 언어학자가 인류 문명의 기초가 과학인지 언어인지 토닥이는 장면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킥킥 웃었던 것, C가 ----했던 것. 어느 밤 유독 ----한 끝에 네 고막이 얼얼하게 울리도록 ----했던 것. 뇌리에 각인된 모든 사적인 몸짓과 지엽과 감각과 음절들.

부유스름한 겨울 아침 볕에 황갈색 잎사귀 끝이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것. 현관문 앞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던 고양이의, 다소곳이 모인 앞발과 꼬리. 속옷을 챙겨 입고 고양이에게 문을 열어 주는 C의 목소리. 알 수 없는 고장으로 늘 덜덜 떨리는 라디에이터의 소음. 양심의 가책과 싸우며 사 온, 9달러 가까이 하는 단 귤 한 봉지를 반쯤 까 먹고 남은 향기롭고 폭신한 껍질 모다기. C의 목도리를 떠 주고 남은, 반 파운드 조금 못 되는 오렌지색 양모 털실 한 타래, 장미목 뜨개바늘.


나는 사과를 좋아하고 호도와 잣과 꿀을 좋아하고, 친구와 향기로운 차를 마시기를 좋아한다. 군밤을 외투 호주머니에다 넣고 길을 걸으면서 먹기를 좋아하고, 찰스 강변을 걸으면서 핥던 콘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2008년쯤에도 너는 이별 연습을 했었다.

2016년의 서울은 네게 폐광이다. 곡괭이를 찔러넣는 곳마다 부스러기 기억만 서걱댈 게 분명하다. 그 썰렁한 대도시를 -- 대학로를, 한강변을, 익숙하고 꼬질꼬질한 모든 구석들을 -- 혼자 누빌 자신이 네게는 없다. 그 위에 뭔가를 더 쌓기 위해서는 도시 전체를 깨끗이 밀어내야 할 것이다.

사랑한 자리가 말 그대로 폐허라고 황지우 풍의 허세를 부려 보다가도 햇수를 세어 보면 너는 사막 신전을 질질 끌고 다니기는커녕 강산이 변하는 동안 함께 변해 버린 평범한 병신이라는 생각에 위안을 얻곤 한다. 사랑이며 연애를 책으로만 배워 그럴듯한 흉내는 낼지언정 사랑놀음을 사랑으로 끝내 바꾸지는 못하는 것이 네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로잘린을 진정으로 사랑한 적은 없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치졸하고 간단한 변명이다. 감정의 의무를 자처한 적이 없으니 책임도 짊어질 필요가 없다. 사람이란 자기합리화를 위해 어떤 이야기라도 지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동물이다.

love, 의 동의어를 검색하니 think the world of, 가 목록에 뜬다.

난 이 나라에서 만들어지는 것밖에 몰라, 하고 C는 말했었다. You bring the world to me.

자신의 세계에 상대방을 어떤 방식으로든 두는 일, 또 상대방의 세계에 자신을 어떻게든 편입시키는 일 -- 사실 사랑의 메타포는 늘 편입이었다. 셰헤라자드는 술탄의 하렘에 -- 당시의 황궁은 별도의 법도와 질서를 가진 하나의 세계였으므로 -- 자신을 편입시키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세계에 술탄을 끌어들인다. 술탄의 극단적인 여성혐오는, 자신의 세계에서 누군가가 다른 이야기를 몰래 써 내고 있었음을 -- 왕비의 불륜을 -- 알게 되는 것이 그 원인이다 -- 은 어떻게든 가능하다.


너는 늘 상대방보다 많은 것을 기억했다. 도시 하나, 사람 하나의 기억 파편을 모아 도시 하나, 사람 하나를 새로 짓는다면 -- 세계 곳곳에 산재한 성자의 유골들이 그렇듯 -- 너는 1:1 비율에 크게 어긋난 괴물을 만들고 말 것이다.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은 기억밖에 없다면, 그럼에도 그 기억조차 공유될 수 없다면. 이것만은 너와 내가 진심으로 공유했었다고, 그때 너와 나는 함께 집을 지어 보기도 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강산이 변하는 시간 동안 네가 건져내어 보관하고자 했던 순간들마저도 네 로잘린은 파기와 무효화와 백지화를 요구한다. 아마 9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는 너무도 당연히 너를 다시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만은 아름다웠다고, 이것만은 진심이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도 없도록, I loved you를 말할 권리조차 없이 -- 기억의 전면 파기.

어차피 공유될 수 없는 기억이라면 억지 동기화도 필요하지 않다.

어차피 너와 그의 세계는 오래 전 분절되어 있었기에.

이 모든 체념들, 포기들. 어차피, 원래부터, 본디. 사력을 다해도 간직하고 함께할 수 없는 것들.


너는 어차피 현재지향형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날마다 네 측두엽 속 집적회로에 C의 손짓, 표정, 감각 -- C와 처음 방문했던 재즈바에서 네게 내어 준, 일반적인 양의 두 배는 되어 뵈던 네그로니, 루프를 기이하도록 크게 빼어내어 아침마다 두 번 매듭을 짓는 C의 주황색 신발끈, 때로 노래하듯 오르내리는 목소리의 인토네이션과 구개음이 거의 없이 발음하는 cucumber의 ku-. 웃을 때면 한없이 찡그러지는, 뭔가에 집중할 때에나 비로소 제 모양을 찾는, 꼬리가 살짝 아래로 처진 눈매무새 -- 을 조각내어 촘촘히 심을 뿐이다.

기억은 와인 없이는 가벼운 짐이므로, 아마도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다. 네가 너로 존재하는 한은 아무도 침범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네 세계, 네 머릿속 폐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