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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비가 그치듯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새해라면 절필

새해라면 절필



새해에는 이 언어를 버리고 싶다고 너는 막연히 생각했었다.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네 본명조차 낯설어진 요즈음에도 너는 모국어로 연애를, 식사를, 모호한 감정들을 인지한다.

모국어를 잊으면 다소 건조한 연애쯤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C는 네게 유화 도구를 한 벌 -- 나중에 C의 화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C가 난데없이 메시지를 보내 유화를 그리려면 뭐가 필요하냐고 물었었단다 ("붓이랑 물감 말고 또 뭐가 필요한가? 하길래 내가 그랬어요, 자, 종이랑 펜을 준비하고, 내가 말하는 것들을 모조리 받아 적어.) -- 선물해 주었다. 미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너는 무턱대고 페인팅나이프를 하나 집어들어, 젯소를 바른 캔버스에 울트라마린 물감을 두텁게 얹었다. 캔버스에 눌린 새 붓끝이 부드럽게 열렸다.


물감이 마르기까지는 -- 안료마다 그 속도가 다르다고는 하나 -- 대략 사흘의 시간이 소요된단다.

솔벤트 냄새에 머리가 아프다.


--


2016년 12월 31일. C와 시카고 미드웨이 공항에 착륙해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 로부터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 아.

- 무슨 일 있어?

- 전 남자친구가 뭘 보냈어. I'm not even going to bother with this now.

- 아, 그 사람. 지금 뭐 한다고 했지? 아직 군대에 있댔나.

- 그건 한참 전 얘기지. 아직 대학생이야. 요즘 뭘 하는지는 모르겠네.

어차피 이어폰을 가져오지 않아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 녹음파일을 들을 방도는 없다. C와 딱 한 번 데이트를 한 적이 있다는 친구의 -- "그러고는 그냥, 아마 둘 다 친구로 지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 차 트렁크에 수트케이스를 싣고 시내의 숙소로 향했다.

항공권은 C의 마일리지로, 숙소는 네 신용카드로 예약한 연말 여행은 C의 제안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이유였다. C의 대학 친구들 스무 명을 만나 네가 모르는 이름들과 네가 모르는 기억에 일곱 시간 가까이 귀를 기울였다. 네가 잘 아는 사람들과의 파티도 세 시간 이상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너는 -- "미안해, K. 사람 만나는 것 힘들어하는 거 알아." -- 새벽 두 시즈음 소파에 드러누워 탈진을 선언했고, C는 너를 달래고 얼러 숙소로 데리고 돌아왔다.

4년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 속에서 -- 문화를 하나의 기억으로 치부한다면 그들이 공유하는 20년 이상의 세월을 너는 알지 못하는 셈이다 -- 너는 9년의 기억을 생각했다.

C를 알고 지낸 것은 이미 일 년, 더 가깝게 알고 지낸 지도 -- 네 여름을 차감한다 해도 -- 벌써 반 년 가량이 되어 간다. 이 사람과도 많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너는 날마다 머릿속에 구슬처럼 굴려 본다. 아직 '허니문' 기간이라 그렇게 날마다 붙어 지낼 수 있다고 9월쯤 진단했던 친구들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지금도 C는 하룻밤에 세 번까지도 네 몸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남편보다 네 살이 어린 친구 R은 그 말을 듣고 깔깔 웃으며 말했었다, 그건 아직 젊어서 그래. 3년만 있어 봐.

3년이라.

3년 뒤를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

3년 뒤에도 C는 아침마다 시리얼에 아몬드밀크를 부어 먹고 있을까. 3년 뒤에도 너는 이 아파트에 살고 있을까. 3년 뒤에도 C의 신발끈은 -- 여름에는 날마다 티셔츠에 청바지, 겨울에는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으로 -- 같은 오렌지색, 같은 모양의 매듭일까. 3년 뒤에도 너는 네그로니 칵테일을 좋아할까. 3년 뒤에도 C와 너는 서로 생일선물을 교환하고 있을까.

3년 뒤에. 3년 뒤에는.


--


2017년 1월 3일. 20분짜리 녹음 파일을 드디어 돌려 듣는다. 망령 같은 9년이 똑같은 레퍼토리로 귓전을 때린다.

그만 지긋지긋하다, 이제는.

한때, 이렇게 -- 사랑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하는 일에조차 너는 이제 지쳤다. 남들에게도, 그와 너에게도, 이제는 무의미한 이야기일 것이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차고 넘치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타인에게서 찾으려 했던 사람들의, 그저 그런 이야기.


C는 네가 고양이처럼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너는 2주에 한 점씩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

당분간 우울한 언어는 내려놓아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다른 연애의 언어를 배울 때까지는.


하지만, 드디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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