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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

리뷰: 가스파 노에의 <러브> (2015) 에로티카를 평함에 있어서도 내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에로티카는, A) 최대한 성적인 컨텐츠를 가장 노골적으로, 가장 미학적으로 표현하되, B) 각 장면이 관객으로 하여금 자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영화가 끝난 후 오히려 인생에 대한 절망감으로 자위 욕구를 느끼게끔 한다면 보너스 포인트.) 그런 의미에서 가스파 노에의 는 멋진 에로티카다. 위의 두 기준을 설명하면 으레 돌아오는 질문은 A는 그렇다 쳐도 왜 B를 고집하는가, 인데, 에로티카는 포르노그라피와는 다르다. 포르노그라피가 소모품이라면 -- 저는 소장하는데요? 라고 또 으레 반문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모성은 음식물의 소모와도 같은 것이다. 짜장면을 일주일에 한 번씩 시켜 먹는 것과, 이 집의 .. 더보기
가질 수 없는 것들의 박물관 1 야한 연애소설을 쓰기는 쓰는 거냐고들 하시길래. 뭐라도 조금씩 쓰고 있음을 증빙하는 자료로 올립니다. 가질 수 없는 것들의 박물관#1 일랴 이삿짐이 가득한 방에서 여자는 언제나처럼 남자를 맞았다. 재회가 영 없을 이별도 있다.그래서 남자는 어느 때보다도 길고 잠잠하게 여자의 성기에 입을 맞췄고, 여자는 눈앞에 오가는 남자의 얼굴을 피하지 않은 채 남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지막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입과 입이 만나 체액을 나누고, 입과 성기가 만난다. 남자는 늘 여자를 갖기 전 여자의 입을 먼저 원했다.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여자의 기도가 막혀오기까지 여자의 입 속으로 성기를 밀어넣었다. 그렇게 잠시 들숨과 날숨이 멈추는 순간이면 여자는 늘 어금니 안쪽을 눌러 오는 남자의 성기에 포진해 있.. 더보기
가벼움과 무거움과 말과 돌 가벼움과 무거움과 말과 돌 나는 너에게 비트와 바이트로 글을 쓰고 있다. 칼비노는 1985년, 하버드에서의 강연을 앞두고 사망했으며, 그가 보았던 가벼움의 정수 -- 해저를 지나는 전화선 -- 는 지금 우리 삶에서는 오히려 이미 무거운 침전물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의 파편과 자음과 모음이 -- 0과 1과 미세하고 균일한 파동 여럿으로 쪼개진 음성들이 -- 내 주변의 허공을 날고 있다. 요즘 이탈로 칼비노라는 작가에 푹 빠져 있다. 아마 영 불가능한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 내가 언어 여러 개를 실제로 배워 내서 구사해야 하는 학생이 아니라, 그냥 책 좋아하는 애서가였다면 --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는 책을 어떻게든 구해, 내 알량한 불어와 서반아어에서 라틴어 어원을 끄.. 더보기
계절적 대안적 사랑 (친구 남자친구 분들 중에는 제가 남자친구 얘기 쓰는 걸 부러워하시는 분도 있던데. 제 남자친구는 참고로 제가 자기 얘기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닌가?) 원고번호 2 작희계절적 대안적 사랑 아마 현실적으로 성취가 불가능한 소원이겠지만, 나는 떠날 때 신발을 좀 선물 받고 싶다. 신고 오래 걸어도 편안한 신발. 광야를 오래 걸어도 해지지 않고, 닳지 않을 신발. 물소 가죽 신발. 투박한 신발. 여자가 떠날 때 신발을 선물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아마 -- 떠났지만 -- 그 사람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걷는 길이 다르더라도 너의 꿈을 응원한다는 뜻이니까. 내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예쁘고 불편한 신발을 줄 이유는 없다. 굳이 준다고 하면 그것은 모욕의 한 방법일 것이다. 신고 오래 걸을.. 더보기
이 모든 것이 또한 실패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이 또한 실패한다 해도 이전에, "만일 이 모든 것이 실패한다 해도, 내게는 공립도서관이 있다"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사람도 동물과 같아서 이상적인 서식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라가 될 수도 있고, 도시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직장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어느 장소에 가든 생활방식이 크게 변하지 않고, 도시와 금방 사랑에 빠지는 편이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는 서식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요즘 느끼는 것은 내 서식지라는 게 이 생활방식 자체라는 사실이다. 좋은 도서관이 있고, 글을 쓸 수 있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유년기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는 내 서식지이고, 그것이 없어진다 했을 때에 내가 멸종하지 않을 거란 자신이 없다. .. 더보기
타고르와 셸리와 형이상학 오늘 모 선배가, 우리는 왜 사귀게 되었냐고 해서, 그 답을 집에 오는 길에 곱씹어 보다가 몇 자 적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연애쯤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일단 그런 질문을 들으면 나는 왜 당신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것부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당신과 나도 답을 모릅니다.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하여는 임의의 답이 정답이 되겠지요. 고대 사회의 신화만 보더라도 가장 신빙성 있는 '구라'가 모든 것을 설명해 내지 않던가요. 그래서 내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든 양상의 본질인 우연이라고 하는 물리법칙과 그 통속성에서 그나마 건져낼 만한 것이 -- 그 자신은 우연의 산물이라 해도, 보는 이로 하여금 필연을 믿게 할 만큼 사랑스러운 것이 -- 나와 당신의 실존이 시공간.. 더보기
(쓰는 중) 액트 오브 킬링 액트 오브 킬링 (2014) The Act of Killing 9감독조슈아 오펜하이머출연안와르 콩고, 헤르만 코토, 시암술 아리핀, 하지 아니프, 사크햔 아스마라정보다큐멘터리 |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 스웨덴, 핀란드 | 159 분 | 2014-11-20 모 선배의 요청으로 작성하는 해설 및 리뷰입니다.사실 제가 영화평론 전공도 아니고, 모국어로는 학술적 글쓰기를 해본 경험이 없어 (본문은, 하고 시작하는 류의 것이요) 썩 유려한 문장은 쓰지 못할 듯 합니다만, 영화를 보고는 그러지 않아도 비망록 겸하여 몇 줄 적어야겠다 생각하던 차라 간단히 적습니다.일단 줄거리를 요약해야겠습니다만, 그 문제야 역시 제작자들 본인의 설명이 가장 간결하지 않겠습니까. In THE ACT OF KILLING, direc.. 더보기
앞치마에 대하여 (생각들 하시는 그 앞치마가 맞습니다.) 앞치마에 대하여나는 앞치마를 좋아한다. 내가 그걸 입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반대 경우를 좋아한다. 앞치마를 입은 몸매가 가장 완만한 곡선만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좋다. 앞치마는 가능하면 흰색보다는 색깔 있는 무지 천으로 된 것이었으면 좋겠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고등학교 때 읽은 권지예의 단편 때문이다.그때 밖에서 남자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도마질 소리도 들려왔다. 제법 익숙한 솜씨로 리드미컬하게 오이 같은 걸 써는 경쾌한 소리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알몸에 초록색 에이프런울 두른 뒷모습으로 싱크대 앞에 서 있다. 무언가에 굉장히 몰두하고 있다. 올라간 그의 어깨 근육과 질끈 묶은 에이프런 끈 밑에 드러난 알궁둥이가 .. 더보기
무의미의 -- 소네트 식 불균형의 산문 가끔 맞춤법을 지켜 적기조차 버겁도록 모든 것의 인과관계와 당위성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다. 가끔이라 하기에도 스스로 좀 쑥스러운 것은 그 가끔이라 하는 것이 사실 매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이렇게 밝혀 쓰기에도 사실은 좀 쑥스러운 것은 부조리란 다름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포스트콜로니얼을 논하며 셰익스피어를 읽는 내가 한심스러우나, 또 한편 요즈음 잘 나간다는 '우리말' -- 그 우리말이란 것도 과연 누구의 말인가 -- 그래서 나는 시나 소설에서 방언이 그럴듯하게 구현된 것을 퍽 좋아한다 -- 장편 한두 권을 서점에서 넘겨 보며 예술성이란 절대적인 것인지 나의 뇌란 것이 제국주의의 美感에 찌들어 버린 것인지를 고민한다.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도 문장에 한자가 태반인 것을 보면 결.. 더보기
검은 두루마기와 글 검은 두루마기와 글 엊그제 모 모임에서 나눈 대화 중, 제일 부럽다 여겨지는 사람이 누구냐 묻기에 나는 생각 없는 사람이 부럽다 하였는데, 아닌 것이 아니라 요즘 생각이 없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네 생각만 하기에도 일생이 부족할 것 같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차 정신을 차리고는 할 일을 한동안 하고, 쉬고 싶을 때는 다시 입 안에 알사탕 하나 문 것을 하염없이 혀로 쓰다듬고 굴려 보듯이 머릿속으로 너와 네 목소리를 팽이처럼 돌려 본다. 좀 있다 다시 자기소개서를 쓰러 갈 적에는 -- 나 자신을 어떻게든 광고해서 어느 대학에라도 팔아야 할 것인데 그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 그 팽이를 다시 주워 호주머니에 넣을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오늘 생리통으로 종일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