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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타고르와 셸리와 형이상학

오늘 모 선배가, 우리는 왜 사귀게 되었냐고 해서, 그 답을 집에 오는 길에 곱씹어 보다가 몇 자 적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연애쯤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일단 그런 질문을 들으면 나는 왜 당신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것부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당신과 나도 답을 모릅니다.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하여는 임의의 답이 정답이 되겠지요. 고대 사회의 신화만 보더라도 가장 신빙성 있는 '구라'가 모든 것을 설명해 내지 않던가요. 그래서 내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든 양상의 본질인 우연이라고 하는 물리법칙과 그 통속성에서 그나마 건져낼 만한 것이 -- 그 자신은 우연의 산물이라 해도, 보는 이로 하여금 필연을 믿게 할 만큼 사랑스러운 것이 -- 나와 당신의 실존이 시공간의 기묘한 접점에서 서로  만났고, 당신이 나를 사랑했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 그 일 말고는 전연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 내리는 이유를 모릅니다. 눈이 만들어지는 과정-- 응결이니 승화니 하는 것들 -- 이야 알지요. 하지만 눈 내리는 일에 이유가 있겠습니까. 白石은 자신이 나타샤를 사랑하는 연고로 눈이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그처럼 세상의 作動을, 지극히 가냘픈 무언가로 지탱하고 설명할 수 있을 때에 아마 그 무언가가 지극히 가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당신은 세상에 진실은 없다고 농을 쳤고 나는 그러하면 내 허상 -- 콩깍지 -- 속에 갇혀 살겠노라고 응수했으니 세상이 창조된 이유를 당신 하나로 --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하나로 -- 설명한다고 해서 큰 愚가 될 것이 무어라도 있겠습니까. 빅뱅이라고 하는 것도 당신의 갸름한 손톱을 짓고 -- 倭語식으로 표현하면 '지어지게 하고' -- 그 위에 흰 초승달 하나를 돋치게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모국어의 淸濁은 내가 당신을 위해 조합해 낼 수많은 소브리케[sobriquet]의 재료가 되기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빛色이 곧 色인 이유는, 당신의 입술에 포진한 모세혈관으로 내비치는 그 붉은빛色이 내게 빛光이기 때문입니다. 나타샤에 因하여 내리는 눈발처럼 내 우주는 당신에 因해 공전하고 채색되고 작동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인생의 베일입니다. 내 물리학[physics]이고 내 형이상학[meta-physics]입니다.


이만큼이 내가 토요일쯤에 아이폰 메모장에 적은 크로키입니다. 무언가를 덧붙이려 하였더니 생각나는 말이 없기에 그대로 내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