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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앞치마에 대하여

(생각들 하시는 그 앞치마가 맞습니다.)


앞치마에 대하여

나는 앞치마를 좋아한다. 내가 그걸 입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반대 경우를 좋아한다. 앞치마를 입은 몸매가 가장 완만한 곡선만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좋다. 앞치마는 가능하면 흰색보다는 색깔 있는 무지 천으로 된 것이었으면 좋겠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고등학교 때 읽은 권지예의 단편 때문이다.

그때 밖에서 남자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도마질 소리도 들려왔다. 제법 익숙한 솜씨로 리드미컬하게 오이 같은 걸 써는 경쾌한 소리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

남자는 알몸에 초록색 에이프런울 두른 뒷모습으로 싱크대 앞에 서 있다. 무언가에 굉장히 몰두하고 있다. 올라간 그의 어깨 근육과 질끈 묶은 에이프런 끈 밑에 드러난 알궁둥이가 단단하게 뭉쳐 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어? 일어났어? 지금 샐러드를 만들고 있어. 프렌치 드레싱으로 하려구."

남자는 샐러드유를 조심스럽게 계량 스푼에 따르고 있었다. 유리그릇에 식초, 소금, 후추를 더 넣고 휘젓던 남자가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본다.

[...] 샤워를 끝낸 여자는 남자와 아침식사를 했다. 커피는 맛과 향이 훌륭했고, 토스트는 알맞게 구워졌고, 계란프라이는 터지지 않고 고소했다. 드레싱이 알맞은 샐러드도 오래 휘젓지 않아 재료의 싱싱함이 그대로 살아 있어 훌륭했다.

~ "뱀장어 스튜", p.45-6; 54.


개인적으로 나는 식사를 묘사하는 소설을 참 좋아한다.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대개 전문 요리사는 아닌 터라, 아무리 직업 요리사인 서술자의 탈을 쓴다 해도 그 산문과 대화가 얼마쯤은 작위적이다.

식사라는 행위가 때로는 섹스보다도 더한 외설일 수 있다. 산문의 음식은 작위적이라는 점에서, 단어와 문장으로 재구성하는 식사는 포르노그라피라 할 수 있겠다.

위 소설의 주인공인 여자는 유부녀이고, '남자'는 그녀의 남편이 아니다. '남자'가 그녀에게 싱싱한 샐러드를 제공하는 반면 '남편'은 그녀에게 삼계탕 -- 뭉근하게, 흐물거리도록 끓여낸, 그러나 묵직한 -- 을 끓여주고 싶어한다.

저런 남자는 사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주섬주섬 일어나 티셔츠와 스웨트팬츠를 주워 입고 그릴드치즈쯤을 요리해줄지는 몰라도, 세상 그 어떤 남자가, 아마도 아직 자고 있을 여자를 위해, 알몸에 초록 앞치마를 질끈 두르고 샐러드를 만든단 말인가 (프렌치 드레싱, my ass -- ). 세상 어떤 여자도 알몸에 앞치마만 -- 편의를 위해 -- 두르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다. 저 상황의, 가히 아방가르드적이라 할 만큼, 부조리하며 작위적인 모든 분위기 때문에 나는 저 장면을 참 좋아한다.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요리를 하게 된 건 아마 생존본능에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오감의 하나가 한 타인과 이어진다는 것이 그렇게 무참할 줄이야. 너와 함께 살면 막연히, 네가 나를 위해 아스파라거스를 기름 두른 팬에 굽고, 마트에서 사 온 토마토소스에 양파를 더 넣어 스파게티를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닭 육수를 내고 생면을 삶고 홍합을 넣어 칼국수를 해 줄 것이었고, 다시마를 넣어 라면을 끓여 줄 것이었고, 길을 걷다가 핸드폰을 뒤지지 않고도 용케 맛집을 찾아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었고, 한참을 걷다 내 입 안에서 떡볶이 맛이 사라질 때즈음엔 네 침도 언제나 달콤할 것이라고. 네가 없는 내 삶에서는 내가 내 자신을 위해 아스파라거스를 구워야 할 것이었다.

요컨대, 네가 없어도 '맛'이 내 삶에 존재한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 처음의 아스파라거스만큼 내가 아스파라거스와 방울양배추를 맛있게 요리할 줄 알게 된다면 아마도 네가 없어도 오감의 하나를 상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양파를 익숙히 썰고, 오일을 능숙히 덜어 넣고, 파마산을 적당히 갈아 넣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다만 앤쵸비로 파스타를 만들고, 파이 반죽에 계란물을 칠할 때마다 그것이 모종의 배교 행위인 양 여겨졌을 뿐이다. 

아마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초록 앞치마를 알몸에 두른 채로 계란을 팬에 부쳐 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너는 이른 아침 내가 아직 잘 동안 장을 보아 와서 아침밥을 만들고 나를 깨우는 게 좋았다고 했고, 네가 나를 깨우러 내 옆에 섰을 때에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네 몸에 양 다리를 감았다.

사실 앞치마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앞치마를 두른 알몸에서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단지 내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작위적인 퍼포먼스를 가미하여 아점을 차려 줄 누군가가 -- 그리고 그것에 어느 정도의 진지함을 부여할 수 있는 관계가 -- 필요할 뿐이다. 아마 그런 날은 나는 문어 샐러드를 요구할 것이고, 초록 앞치마를 두를 수 있는 남자라면 문어에 아삭한 채소를 곁들여 식탁에 대령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가 내게는 있었다.

앞치마를 둘러 줄 남자를 찾으면 사실 없지는 않을 터였다. 네가 없이도 미각은 존재했고, 나는 루꼴라라고도 하는 아루굴라에 멸치와 토마토를 얹어 피자를 굽거나, 아몬드와 자몽 조각과 아보카도와 블루치즈를 버무려 샐러드도 만들 줄을 알게 되었다. 그 샐러드를 맛있게 먹어 줄 사람도, 아침에 어설프게나마 아침밥을 차려다 줄 -- 사다 줄! -- 사람도 아마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그 모두를, 그 때의 그 아스파라거스 한 대궁과 바꿀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

그랬다,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