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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무의미의 -- 소네트 식 불균형의 산문

가끔 맞춤법을 지켜 적기조차 버겁도록 모든 것의 인과관계와 당위성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다. 가끔이라 하기에도 스스로 좀 쑥스러운 것은 그 가끔이라 하는 것이 사실 매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밝혀 쓰기에도 사실은 좀 쑥스러운 것은 부조리란 다름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포스트콜로니얼을 논하며 셰익스피어를 읽는 내가 한심스러우나, 또 한편 요즈음 잘 나간다는 '우리말' -- 그 우리말이란 것도 과연 누구의 말인가 -- 그래서 나는 시나 소설에서 방언이 그럴듯하게 구현된 것을 퍽 좋아한다 -- 장편 한두 권을 서점에서 넘겨 보며 예술성이란 절대적인 것인지 나의 뇌란 것이 제국주의의 美感에 찌들어 버린 것인지를 고민한다.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도 문장에 한자가 태반인 것을 보면 결국 나에게 포스트콜로니얼이란 그 어느 쪽으로도, 고대 영어로 쓰는 시만큼이나, 불가한 것이다.

네슬레 사를 그토록 싫어하여 페리에를 먹지 않아도 커피와 아이폰을 끊지 못하는 내가 싫다. 애시당초 나는 왜 커피를 마시게 되었으며 -- 이름도 낯선 중동의 음료를 -- 왜 성경을 -- 투 밀레니아 전쯤 죽었다는 중동의 모 어촌의 청년 이야기를 -- 읽게 되었는가. 왜 지극히도 서구적이며 상업적인 '나'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어 삶에서 이토록 많은 의미를 찾으려 할까. 상업주의에 치를 떨면서도 왜 철이 바뀔 때마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눈두덩에 칠할 화장품을 구경하러 가는 것인지.

무엇도 옳지 못하고 무엇도 완전히 그르지 않다. 세상은 대개 안 꿰어진 역사의 구슬 서 말에 불과한 것이고, 그 중 다들 눈에 맞는 구슬을 손에 담을 수 있는 만큼 꿰어 가치관이라고 부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하다못해 신문도 보기 좋은 것만 골라 볼 수 있는 세상인데. 

하염없이 부유하지 않기 위해서 작위적으로라도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일반은총이고 -- "The sun also shines on the wicked" -- 모든 추상적이고 넓은 개념은 흔들림 없는 구심점이 필요하기에 -- 단지 그래서.

내 그대를 한 여름날에 비겨 볼까?

그대는 더 아름답고 더 화창하여라.

거친 바람이 5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여름의 기한은 너무나 짧아라.

때로 태양은 너무 뜨겁게 쬐고

그의 금빛 얼굴은 흐려지기도 하여라.

어떤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기울어지고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고운 치장 뺏기도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

죽음도 뽐내진 못하리, 그대가 자기 그늘 속에 방황한다고

불멸의 시편 속에서 그대 시간에 同化되나니.

인간이 숨을 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이 시는 살고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적어도 네가 있는 한 나는 템페스트의 칼리반을 생각하지 않고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을 것이기에 -- 나타샤 -- 너를 나타샤라고 부르는 일에 대하여도, 에밀리 디킨슨의 열등한 아류인 양 대쉬(--) 없이 글을 쓰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도, 한 점 의심이 없이.

이리 보면 나는 체호프의 올렌카만큼이나 백지에 가까운 뇌를 가진 사람이다.

너에 대한 내 사랑은 늘, 박동하며 고여오는 눈물의 온기였다. 침묵과 눈물, 네 무릎을 덮은 따뜻한 비단이 내가 상상하는 천국의 전부였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은총"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