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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너와 나의 바벨 -- 블레이크의 신화에 비추어

제니퍼 슈츠는 "So Nakedly Dressed"에서, 여성의 몸을 묘사를 통해 재구성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슈츠는 롤랑 바르트의 S/Z를 이론적 기반 삼아 나보코프의 <아다>와 <롤리타> 두 소설을 논하는데, 묘사를 하려면 무언가를 끊임없이 나열해야 하는 언어의 특성상, 묘사의 대상이 되는 어떤 신체는 조각나게 될 수밖에 없다. 독자에게, 그 아름다운 신체를 온전히 제시하기 위해, 묘사자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나열할 수밖에 없게 되고, 열거되는 목록이 길어질수록 신체의 파편화는 심화된다. 종내, 그 신체에 대응하는 어떤 개인 -- 아다, 그리고 롤리타 -- 은 그 묘사로부터 점점 유리되며, 묘사를 통해 애인을 소유하고자 했던 서술자는 종내 한 무더기의 조각난 신체와 함께 홀로 남겨진다.

다시 말해, 너의 침은 너라는 원형으로부터 독립적이다. 


원고번호 2

작희

너와 나의 바벨 -- 블레이크의 신화에 비추어

"사랑은 비둘기여라, 그대는 매가 아니다"


이 년 전 가을에 공부하던 아랍의 고전 시는 사랑하는 사람 -- 그 사랑의 대상이 주로 미소녀보다는 달처럼 환한 얼굴과 젤리처럼 찰랑이는 -- 정말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 볼기를 지닌 미소년이었는데 -- 의 타액을 달콤한 포도주에 비유한다. 입을 맞출수록 취하고, 그 맛이 농익은 과실주처럼 달다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아부 느와즈의 시를 읽을 때마다, 하지만 8세기 즈음에는 아마 사람들이 평생 양치를 하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는 겨드랑이에 며칠씩 끼워 두었던 사과를 애인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하니, 혀에도 분명 콩깍지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네 침은, 그러니까, 일테면 아몬드 같은 맛이다. 그러한 결론을 내리고 '일테면 아몬드 맛'이라는 그 말에 대해 조금 더 곰곰 생각해 본다. '일테면' 아몬드 맛인 것이 아니라, 아마 그냥 아몬드 맛인 것 같다. 미뢰에 가득 온기가 퍼졌을 때에야 은근한 단맛이 감돌고, 점성으로 끈적이거나 들척지근함이 없이 맑고 고소하다.

그 말을 너에게 한 후에 내 침은 무슨 맛일까 생각해 본다. 침 생각을 하니 침샘이 촉촉해진다. 입 안 가득 침이 고여도 별다른 맛이 없이, 맹물보다도 밍숭맹숭한 맛이다. 너에게 물어본다 해도 너 역시 아마 적당한 대답을 모를 것이다. 무언가 머리를 짜내어 말한다 해도 그 대답이 실망스러울 것 같기도 하여 굳이 물어보고 싶지는 않다. 누가 뭐래도 내 침에서 딸기 요거트 같은 맛이 나지는 않을 것이기에.

나는 내 침의 맛을 모른다. 침은 본디 입에 속하는 연유로, 내 혀는 내 침의 맛에 익숙한 탓이다. 나는 내 목소리 또한 모른다. 내 음성은 내 성대에 고유하고, 고막에 와 닿는 내 목소리는 두개골과의 공명과 섞이어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내 눈동자를, 네가 내 눈을 들여다보듯 들여다볼 수 없다. 사진과 영상은 깊이를 전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내 피부와 점막이 너의 신경에 어떤 감촉으로 가 닿는지조차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네가 보는 나와 내가 아는 내가 다르듯 -- 내가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만지는 너는 네가 아는 너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주체와 객체, 뼈 상자 안의 감금 등의 클리셰로 간단히 요약될 이 문제가, 네 침이 달콤하기에 나는 새삼, 그리고 유독, 안타까운 것이다. 너의 침은 아몬드 맛이라는 괴상한 말을 들려주는 대신 그 맛을 소통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바벨탑 사건은 언어뿐 아니라 총체적 에피스테몰로기의 붕괴이기도 한 것이다, 블레이크의 '실낙원'처럼.

(진짜 요는, 네 침이 아몬드 맛이라고. 근데 알려줄 방법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