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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

우리 헤어지는 연습 우리 헤어지는 연습 우리 언젠가 헤어져야 하잖아요. 헤어지는 연습을 해 봐요. 요즘 - 너는 이상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 이사할 일이 두려워 살림살이 늘리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던 사람이 삶의 부속물을 모아들인다. 중간 크기의, 모교 엠블럼이 찍혀 있는, 머그 하나에 커피도 라면도 오트밀도 케이크도 담아 먹던 네가 종이학 문양이 아로새겨진 예쁜 찻잔 세트에 눈길을 주고 세일 기간을 기다리고, 가구며 주방기구를 사들인다.또 어딘가로 떠나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이것들을 짊어질지 내버릴지 너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는 불완전한 육체를 보완하기 위한 연장[延長]이라 보아도 좋다. 많은 음식을 몸에 한꺼번에 저장할 수 없기에 외장-위장인 그릇을 만들었고, 포식동물의 송.. 더보기
혀로 할 수 있는 모든 것 #1 인생 보르시[борщ] #1 인생 보르시 [борщ] 0.보르시[borscht, borshch, борщ]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1. 영어에서 그대로 음역을 하다 보니 우리말이나 일어 문학에서는 '보르시치'라고 적는 경우도 있다. 너는 그 이름을 라는 일본 소설에서 처음 접한다. 섹스는 곧 죄이자 타락이자, 영혼의 사랑에서 벗어나는 불륜이라는 열다섯 살 너의 속단을 부수어 준 것이 그 다소 허섭스레기같은 책인데, 아무튼 그 소설에서 시한부 -- 당연히 암 환자인 -- 여주인공 요코는 남프랑스의 니스까지 남자친구 류지와 여행을 떠난다. 갖은 치료로 이미 식욕이 없어진 요코가 니스까지 가서 꼭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러시아 양배추 수프인 '보르시치.' 러시아인 택시 운전사의 도움을 받아 류지는 보르시치를 끓여 .. 더보기
연애의 정서와 연애의 언어 연애의 정서와 연애의 언어 오늘은 하루 종일 네가 보고 싶었어, K -- 그런 점에서 여느 날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고 말이지. 네가 어젯밤 썼던 베개를 베고 있으니까 네 냄새가 난다. 보고 싶어. 요즘 제법 인기가 많은 것 같은 새 블로그 포털에 직접 요리해 쓰는 음식 에세이를 연재해 볼까 하다가 -- 첫 에세이는 아마도 보르시 -- 보르시는 너의 해장 수프이기도 해서, 너의 냉장고에는 항상 자줏빛 수프가 담긴 큰 유리병이 하나씩 놓여 있다 -- 의 사진과 역사와 조리법과 내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 전 애인이 역시 음식을 컨셉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만둔다. 보류, 라 해도 좋다. 그에게도 그의 공간을 주어야 할 것이다. 대신 너는 하와이의 코나 맥주나 -- 이제 으레 C는, 너와 .. 더보기
청명 청명 날이 좋다. 휴대전화 시계 대신 -- 시간대를 숱하게 넘어다닌 탓인지 언제부턴가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한 핸드폰 시계는 오 분, 칠 분, 십 분, 종내는 십구 분이나 빠른 시간을 안내하게 되었다 --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열두 시 오십오 분.C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약속장소 앞에서 기다리는 대신 C네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가방도 모처럼 -- 소설책 한 권을 복사해 제본한 종이 한 묶음을 제외하면 -- Eve de ses décombres, Eve out of Her Ruins -- 가볍다. 볕이 좋다.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바람도 햇살도 투명하다. 벽난로가 있는 집으로 이사했으니 긴 겨울도 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기대한다. 삶의 틀은 잡혀 간다. 고기를 뺀 레시피로 보르시를 .. 더보기
과거 완료, 패스트 퍼펙트 과거 완료, 패스트 퍼펙트 (며칠에 나누어 여러 문단씩 쓴 글이라 어느 문단의 어제가 어느 날인지 알 길이 없다. 삶은 요일에서 비끄러져 나와 어제와 오늘과 내일, 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다.) 1. 목요일이 추석이라는 걸 문득 깨닫고 명절 음식을 해 볼 생각을 한다. 추석 음식은 무엇이 있는지도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검색을 해 보니 토란탕, 송편 같은 것이 나온다. 나는 엉뚱하게도 김밥을 싸고 만두를 빚고 싶다. P에게도 시간이 맞는다면 먹여 볼 생각이니 아마 햄이나 다진 돼지고기니 하는 것은 죄 빼고 두부와 버섯, 다진 김치와 부추 등속을 잔뜩 넣어야 할 것이다. 어제는 파머스 마켓에 다녀와, 블루치즈와 피칸을 넣어 스콘을 열두 개 구워 내고 -- 직사각형의 반죽을 밀가루를 묻힌 칼로 우선 여섯 개.. 더보기
맨발로 길을 건너던 맨발로 길을 건너던 파티에 남자친구를 데려가, 동기들에게, 선후배들에게 소개를 이럭저럭 해 주게 되었다. 남자친구의 친구들은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다 만나 보았던 터라, 어젯밤으로 대충 인간관계망의 평형은 맞췄다. 같은 자기소개를 십수 번 듣고 ("안녕, 난 P야. 재키랑 같이 왔어." "너도 H대 학생이야?" "아니, 난 M 공대."), 겨울쯤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남미 출신 친구들에게 초대도 받고, 이런저런 놀림도 당하고 ("지난 2주 동안 네가 밥을 다 했으면 재키는 아무것도 안 한 거야?" "아냐, 어제 저녁의 블론드 브라우니는 재키가 그래도 반쯤 만들었어."), 터무니없는 양의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내가 지독히 싫어하는 유명한 교수 하나에 대해 험담을 한참 하고 나니 자.. 더보기
욕심의 반비례 욕심의 반비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지만 아니기도 한 -- 세상의 모든 국제연애자들, 모든 '세계의 끝 여자친구'들을 위해. (사실 옛날 사람들은 은하 같은 강을 건너면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알았고, 고인 같은 애인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경으로 오작교를 하늘에 지었을지도 모르죠. 비행기가 생기고 비디오채팅이 생겼다고 사람 사는 것이 그리 다를까요.) -- "누가 보아도 나더러 읽으라고 내놓은 글이라 거듭거듭 읽었거든요.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런 글은 잘 썼고 못 썼고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기보다는 그냥 자기에 대해서 쓴 글이라서 괜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라데요. 아마 그 말이 맞을 거예요. 잘 쓴 글이라는 게 결국 나에게 말을 거는 글이니까요. 사적인.. 더보기
집밥 블루스와 미역국 - 연애를 마치고, 시작하며 집밥 블루스와 미역국- 연애를 마치고, 시작하며 방에 한 사람 몫의 물건이 더 있는 걸 빼면 삶이 대체로 단출하다. 잘 하면 올 시월에는 한국어라곤 한 마디도 모르는 남자가 미국 미역으로 쇠고기 없이 끓인 미역국을 먹게 될 것 같다. 기분이 묘하다. 우리 집 식구들은 원래 요리 잘 안 한다고, 엄마 생일과 내 생일이 시월에 일 주일 간격이라 미역국을 끓여서 한 달을 먹는다고, 그런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니 P는 핸드폰을 꺼내 '한국 해초 수프'를 검색한다. 이걸 아예 버스데이 수프라고 부르나보네, 하면서 레시피를 쭉 훑어보더니 아마 끓일 수 있을 것 같단다. 내 미역국은 그렇게 버스데이 수프가 됐다. 미역국에 찰밥을 말아 불려 먹고 싶어진다. 딴에는 '집밥'을 먹고 있기는 하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연애.. 더보기
메밀꽃과 세르비안 쇼: 봉평에서 세계문학 생각하기 메밀꽃과 세르비안 쇼: 봉평에서 세계문학 생각하기 “세르비안 쇼는 노래와 춤을 밑천 삼아 이곳으로 흘러든 가무단으로 반드시 세르비아 사람들로만 조직된 것이 아니라 10여 명 단원이 백계 노인을 주로 하여 폴란드, 유태猶太, 헝가리, 체코 등 각기 국적을 달리하고 가운데에는 유라시안도 끼어 있는 마치 조그만 인종의 전람회를 이룬 듯한 혼잡한 단체였다. 그들의 노래와 춤이 그닷 놀라운 것은 못 되었으나 그들의 색다른 자태가 낯선 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족했고 우리의 관주館主가 상당히 비싼 조건으로 그들과 선뜻 계약을 맺은 것도 그 점을 노려서였다. 한 시간가량씩 하루 두 번씩 출연에 대한 사례가 500원, 엿새 동안에 3,000원이라는 것이 그들을 맞이하는 거의 최고의 대접이었으며 생각건대 만주 등지.. 더보기
빈집 서울을 떠나고 싶어져 비행기를 앞당길 궁리를 한참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헛일이다.열대야로 새벽 한두 시가 되어도 잠들기가 어렵다. 때마침 시작된 생리에 온몸이 꿉꿉하고 저리다. 생명을 내보낸 도시가 말라붙은 고치처럼 찢어진 귀퉁이로부터 서걱이며 부서져 나간다. 나는 천장을 보며 너와 함께 보았던, 너와 함께 보지 못한, 너와 함께 볼 수 있었을, 그리고 너와 함께 보지 못했을 영화들을 셈해 보았다. 집은 사람이 떠난다고 함께 떠날 수 없다고, 네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고, 너는 말했다. 나는 왜 우리는 집과 여행자의 관계가 되어야만 했는지를 생각했다. 네 어깨와 가슴팍에 눈믈이 그렁하게 맺힌 속눈썹을 닦고 싶었다. 나는 울기를 잘 했고 너는 울리기도 달래기도 잘 했다. 네가 두고 간 책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