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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비가 그치듯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청명

청명


날이 좋다.

휴대전화 시계 대신 -- 시간대를 숱하게 넘어다닌 탓인지 언제부턴가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한 핸드폰 시계는 오 분, 칠 분, 십 분, 종내는 십구 분이나 빠른 시간을 안내하게 되었다 --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열두 시 오십오 분.

C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약속장소 앞에서 기다리는 대신 C네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가방도 모처럼 -- 소설책 한 권을 복사해 제본한 종이 한 묶음을 제외하면 -- Eve de ses décombres, Eve out of Her Ruins -- 가볍다.

볕이 좋다.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바람도 햇살도 투명하다. 벽난로가 있는 집으로 이사했으니 긴 겨울도 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기대한다.


삶의 틀은 잡혀 간다.

고기를 뺀 레시피로 보르시를 끓일 때면 손이 비트의 즙으로 자줏빛이 된다. 끓인 수프는 큰 메이슨 병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하다가, 끼니마다 전자레인지에 3분간 데워 토마토와 딜, 스메타나를 곁들여 먹는다. 버섯으로만 된 스트로가노프를 만들어 리본 모양의 파스타와 먹고, 고슬고슬하게 뜸이 든 퀴노아를 샐러드에 버무려 넣는다. 아보카도를 토스트에 얹어 핫소스와 소금, 후추를 뿌려 먹고, 간식이나 아침식사용의 스콘 열두 개씩을 구워 창가에 올려둔다. 묵직한 버터넛 호박을 반으로 갈라 오븐에 구운 후 살을 파내어 갖은 치즈와 함께 파스타 소스를 만든다. (오늘의 소스에는 블루치즈에 호두, 잘게 썬 양파, 파슬리와 레몬을 함께 넣었다.) 먹을 만큼을 떠내고 냄비에 남은 파스타는 유리병에 봉해 냉장한다.

요리를 할 때는 재즈를 들으며 맥주를 마시거나 네그로니를 만들어 스토브 옆에 두고 홀짝인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사 날마다 사진을 찍으며, 필름 카메라를 사 볼까, 하고도 고민한다. (B시 어딘가에 사용료를 내고 사진을 직접 인화할 수 있는 암실이 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전구 같은 조명을 새로 사 방에 달아 두고, 일주일에 네 번쯤 섹스를 한다.


어제는 시시한 일로 C에게 잔뜩 투정을 부려 놓았다. 얼음물로 세수를 해 부은 눈꺼풀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는,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 지금 갈게, 늦어서 미안.

- 우리 이제 저녁 준비하기 시작했어, 얼른 와. 오면 허그해 줄게.

그렇게 여자 넷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큰 잔에 가득 따라 준 와인에는 선뜻 손이 가질 않아 두어 모금을 간신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는다. 입맛도 없어 퍽퍽한 닭가슴살을 먹는 둥 마는 둥 포크로 자잘하게 썰어 놓고만 있자니 친구 하나가 말을 건다.

- 내 생각에는 네가 C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은데.

- 그래? 나는 누구랑 연애를 할 때는 내가 상대방에게 부여한 의미나 프레임, 라벨을 넘어서서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입장이야.

- 그렇다면 나는 네가 틀렸다는 입장이다.

- 다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사실 누구나 상대방에 대해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쌓아올린 환상을 좋아하는 거야. 전 남자친구랑도 그랬어. 나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집이 있는 그 느낌을 좋아한 거고, 그 사람은, 음. 글쎄. 내 이동 반경이나 내가 읽는 책들을 좋아한 것 같기도 하고. 꼭 그 사람에 대한 것만은 아냐. 자기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의미인지를 스스로 상상하고, 그 상상 속의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것일 수도 있고.

- 왜 전 연애가 네 지금의 삶을 규정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여기 우리 다 너랑 C랑 있는 거 봤잖아. 아마 걔는 너 진짜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 보기만 해도 알아. C만한 사람 없다, 너. 얼마나 다정해, 밝고.


C는 밝다 못해 맑은 사람이다.

내가 뱀파이어라면 그 피를 잘생긴 목덜미로부터 고급 와인처럼 달게 들이켰을 것이라고 여러 번 생각했다.


그 맑은 폐포에 -- 수영 선수 출신의 건강한 심폐에 ("고등학교 때는 거의 늘 배고팠던 것 같아. 수영 연습 한 번에 2000칼로리씩이 소모되는데, 그건 거의 성인 한 사람이 하루에 섭취하는 열량이거든. 게다가 성장기이기도 했으니까. 늘 뭔가 먹고 싶었지.") -- 타르를 불어넣는 것이 꺼림칙해, 거리에서 담배를 피울 때면 보도에서 멀찍이 떨어져 불을 붙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 찻길에 서 있을 필요는 없잖아, K. 이리 와.

- 너한테 담배 연기 마시게 하기 싫어서 그래.

- 나 예전 룸메이트도 체인스모커였어서, 진짜로 괜찮아. 네가 뭘 하든 네가 좋아.

- 금방 다 피울게. 금방이야.

- 지금 너, 담배가 몸에 안 좋은 게 속상할 만큼 예쁘다.


내 고민을 끝까지 들어 보고 T는 -- 친구들은 주책으로 한 마디씩 꼭 덧붙여야만 하는 모양인지 C를 구구절절 칭찬한다  -- "게다가 딱 네 스타일 아냐? 머리 좋고 너랑 말도 통하는 사람, 무공해 미소년에 또 몸은 좋은. 그런 남자 세상에 그렇게 많은 줄 알아?" "그늘 하나도 없고, 네가 추석에 달 구경을 가자면 따라와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 열댓 명이랑도 어울리고, 얼마나 예쁘니." -- 아마 내 진짜 고민은 다른 부분이라는 진단을 한다.

이 식탁에 둘러앉은 네 명 중 세 명은 연애며 결혼생활에 굴곡이 많다. 남편과 별거를 하며 남자친구와 장거리연애를 하는 친구가 있고, 공감 장애가 있는 프로그래머 남편을 둔 친구는 최근 사도마조히즘 커뮤니티에서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다.

- 완벽하지. 나를 만나는 것만 빼면 진짜 완벽해.

- 농담도. Everyone wanted to date you.

- Ugh.


--


다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클리셰에 불과한 고민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사랑에 대한 너무도 많은 믿음을 스스로 깨뜨렸고, 다소 기이한 관계들 속에서 무엇이 연애고 무엇이 사랑인지, 연애를 하는 사람과는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호해졌다. 

허울 좋은 부정직보다는 정직한 불완전함이 차라리 좋다고 판단했을 때 삶은 비로소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난다. 다만 그 모든 신기루를 박차고 나온 사람이라면 다시는 사랑에 빠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아마 그래도 좋다고 종종 생각했다.

만 8년의 기념일이었던 작년 9월 14일, 국제구조위원회 -- 시리아 난민을 주로 구호하는 비영리단체 -- 에 기부를 했던 것이 생각나, 다달이 정기 후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사람을 돕지 못하는 삶은 온전한 삶이 아니다. 동시에 타인의 삶을 함께 짊어질 때에야만 삶의 의지가 배가[倍加]된다.


--


화요일 -- 북한에서 모 러시아 감독이 몰래 촬영했다는 영화를 함께 보기로 한 -- 까지 기다리는 대신, 친구들의 조언대로, C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낸다.

- I need to tell you something. 내일 한 시간쯤 시간 내 줄 수 있어?

- 그럼.

- 언제 시간 돼?

- 안 좋은 일인 거면 지금 당장도 갈 수 있어.

- 진짜 별 얘기 아니야. 임신 아님, "we need to talk" [주: "우리 헤어져"] 아님.

- 처리해야 될 시체나 숨겨 둔 남편은?

- No, and no.

- That covers everything. 아무 때나 시간 되니까 오기 전에 연락 줘. 전화 통화 얘기한 거면 더 아무 때나 괜찮고.

- I like seeing you!

- I like seeing you, too. 내일 봐, 그럼. 보고 싶어.

- 나도 보고 싶어. Sleep tight.

- 잘 자.


--


C는 햄프셔 가를 따라 걸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약속 장소인 인도 음식점에 이미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 "좀 일찍 도착해 버려서. 동네 산책 중이었어, 곧 갈게!" -- 걷는다.

음식점이 멀찍이 보이는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건물 앞 벤치에 몸을 살짝 앞으로 굽힌 채 앉아 있던 C가 이쪽을 본다. 오후 햇살에 밤색 곱슬머리가 금갈색으로 환하게 반짝인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한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어 흔들어 보인다. C가 씩 웃는다. 신호가 채 바뀌기 전에 차가 없는 틈을 타 대각선으로 길을 건넌다.


점심을 대충 먹고 나와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헤집고 지난다.

거리가, 날이, 마음이, 맑고 밝다. 청명하다.


- 음식점에서 할 얘긴 아닌 것 같아서 기다렸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마주 깍지 끼어진 손가락들 -- 내 왼손, C의 오른손 -- 이 서로 마디마디를 어루만진다.

일요일이라 문을 닫은 모든 상점들의 창문에 C와 나의 옆모습이 비친다.

- 진짜 별 일 아니어서, 빨리 얘기하고 해치우고 말래. 우리 더 자주 하면 안 될까, 이런 거? 점심 데이트. 그냥 손 잡고 산책.

어딘가에선가, 심각한 이야기를 심각하지 않게 하고 싶을 때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얼굴을 마주하는 대신 손을 잡고 걸으며 말을 꺼내라고 한 기억이 난다.

- 너를 보는 건 언제든지 좋아. 그렇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얘기해줄 수 있을까?

- 그냥. 우리 볼 때마다 같이 자는 것 같아서. 안 그래도 돼?

- 나는 너랑 점심을 먹어도, 영화를 봐도, 그냥 이렇게 얘기를 해도 좋아. 그런데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 지치는 것 같아? 아니면 내가 너를 아프게 해?

- 너랑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좋아. 그런데. 그냥.

나는 발을 보고 걷는다. 보도블럭에 햇살이 튀어오른다.

- 저녁을 먹든 영화를 보든 그 다음에 결국 섹스를 하면 꼭 섹스를 하려고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는 것 같잖아. 나는 그래서 너를 보는 게 아닌데.

- 그랬구나.

-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나 너랑 섹스하는 것 정말 좋아. 진짜야. 네가 그런 생각을 -- 그러니까, 모든 것이 섹스를 위한 포장이라는 생각을 -- 한 적 없다는 것도 아는데, 그냥, 나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좀 불편했어 맘이.

햇살이 좋다.

- 얘기해 줘서 고마워. 나는 진짜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엔지니어처럼 생각했던 거 같아, 어차피 둘 다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 그리고 혹시 눈치 못 챘을까 봐서 하는 말인데 나 너랑 섹스하는 거 좀 많이 좋아하거든 ("꿈에도 몰랐네." 웃음.) -- 한 번 볼 때 이런저런 걸 다 하면 좋다고, 그렇게 생각했거든. 엔지니어링, 효율성.

나는 아하하하, 크게 소리 내어 웃어 버린다. 아주 맑은 양철을 두드린 것처럼 웃음소리가 대기를 타고 퍼져나간다. 

- 뭐든지 스트림라인되면 좋지.

- 아무튼, 진심이야, K. 내가 말로 얘기할 수 있는 것보다 너를 좋아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뭐라도 속상하거나 내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알려줘. 네가 최대한으로 행복한 상태가 나는 좋고, 그 상태가 생겨나고 유지되는 일에 내가 뭐라도 보탤 수 있으면 나는 그걸 할 거야.

- 속마음 말하는 게 나는 익숙하지 않아서. 미안해.

- You goof.


C를 처음 만났을 때쯤, 그 예쁜 손바닥에 까칠하게 습진이 일어난 걸 보고 -- 느끼고, 가 더 맞는 표현이겠다 -- 피부에, 가슴에, 배와 엉덩이에 와 닿는 C의 손바닥이 비늘처럼 거친 것이 싫어 꺼낸 말이었으므로 -- 이건 뭐야,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실험할 때 쓰는 약물이 독해서 그래, 라고 C는 씩 웃으며 대답했었다. 보호장갑을 껴도 피부까지 스며들거든. 그 대화 이후로 무엇을 했는지 C의 손바닥에서는 습진이 사라졌다.

깍지 껴 마주 잡은 내 손 안에서 C의 손가락이 가볍게 떨린다. 마음이, 볕 든 날 널어 둔 솜이불처럼 부푼다.

옛날에 -- 내가 다섯 살, 여섯 살 무렵에 -- 이런 날이면, 이렇게 청명한, 하늘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움에 마음이 종이에 베인 듯 아프도록 맑은 날이면 -- 할머니와 옥상에 나가 고추를 말렸었다고, 아무 문맥 없는 생각을 한다.

네가 있었더라면 올 여름이 훨씬 더 좋았을 거야, 하고 말하던 C를 생각한다.


- 커피 마실래? 아까 밥 먹을 때 1달러 빌려줬잖아 나한테. 내가 살게.

- 커피는 1달러가 아닌데.

- 그럼 그냥 내가 살게.

그렇게 커피를 한 잔씩 들고 나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는다.

한참, 햇살을 어깨와 머리에 담뿍 받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C의 뺨과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손을 뻗어 C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마냥 행복하다.

날이 좋다.


단어를 많이 알수록, 또는 순발력이 좋을수록 유리하다는 보드게임 이야기를 하다가 ("I like words. I really like words." "Nerd.") C가 내 어깨를 붙들고 뺨에 키스를 해 준 것, 동네 어딘가에 있다는 초콜릿 공장 구경을 함께 가기로 약속한 것, C가 입고 있던 티셔츠에서 새 빨래 냄새가 났던 것 ("내 인생은 사실 안 좋은 결정의 연속인데, 결국 보면 그 안 좋은 결정들이 결과는 괜찮은, 그런 것 있지." "그래서 네가 좋아." "안 좋은 결정들을 잘 해서?" "그것도 기술이잖아?"), 내 어깨와 머리카락과 허리를 쓰다듬는 C의 손길이 황홀했던 것, 가을 볕에 잘 마른 내 머리카락이 C의 손끝에서 한없이 부드러웠던 것, 세 시 반에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또 한참을 서로 꼭 끌어안고 ("I think I'll let you go now, finally." "You'd better, or else I'd end up staying.") 아쉬워한 것.

케임브릿지 가를 따라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 공기의 저항이 어느 순간 사라진 것처럼 -- 한없이 가벼웠던 것, 집에 돌아와서도 침대에 대 자로 누워 몇 시간이고 C의 머리카락을, 목소리를, 손마디를, 수염으로 까칠한 뺨과 턱을 기억한 것.


그래서 공기와 햇살이 투명한 가을날에 나는 사랑을 다시 믿어 보기로 한다.

이번엔 더 잘 할 거야, 괜찮을 거야, 행복할 거야, 라고 되뇌면서.


일단은 -- "아까 잊어버리고 안 물어봤는데, 우리 생일 저녁 좀 좋은 곳에서 먹지 않을래? 테이스팅 메뉴 있는 곳 찾아서 예약해 둘게." --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