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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비가 그치듯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연애의 정서와 연애의 언어

연애의 정서와 연애의 언어


오늘은 하루 종일 네가 보고 싶었어, K -- 그런 점에서 여느 날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고 말이지. 네가 어젯밤 썼던 베개를 베고 있으니까 네 냄새가 난다. 보고 싶어.


요즘 제법 인기가 많은 것 같은 새 블로그 포털에 직접 요리해 쓰는 음식 에세이를 연재해 볼까 하다가 -- 첫 에세이는 아마도 보르시 -- 보르시는 너의 해장 수프이기도 해서, 너의 냉장고에는 항상 자줏빛 수프가 담긴 큰 유리병이 하나씩 놓여 있다 -- 의 사진과 역사와 조리법과 내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 전 애인이 역시 음식을 컨셉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만둔다.

보류, 라 해도 좋다. 그에게도 그의 공간을 주어야 할 것이다.


대신 너는 하와이의 코나 맥주나 -- 이제 으레 C는, 너와 함께 누군가의 파티에 갈 때는, 홉과 여름의 향기가 폴폴 풍기는 IPA를 함께 사 오곤 한다 -- 그루지야 산 사페라비 와인을 마시며 -- 도서관에서 빌려 온 김연수를, 스물다섯 살의 정서로 서사하는 연애 이야기가 담긴 그 단편선을 -- 훔친 책을 읽는 마음으로 읽는다.

(케이케이라는 -- 성의 없는, 그러나 머리를 잔뜩 굴려 낸 작명임이 분명한 -- 이름을 보고 너는 괜히 손끝이 저리다. 케이케이는 'ㅋㅋ'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 인물은 일종의 농담이기도 하다.)


C와 너는 생년, 생월, 생일이 같다.

시차를 고려하면, 그리고 네가 아침 여덟 시쯤, 동경 표준시로도 비교적 이른 시각에, 태어난 것을 생각하면, 네가 실상 하루 누나라고, 너는 C에게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네가 세상에 나와 눈을 뜨고 숨을 골랐을 그 시점에, C의 고향인 뉴저지의 교외 벽에 걸린 모든 달력은 아직 199X년 10월 13일을 가리키고 있었을 거라고.


B시 모처의 재즈바로 데이트를 간 날, C는 자기는 대학에서 한 쿼터를 일찍 졸업했다고 뿌듯하게 말했었다. 2주 뒤 M대 근처의 식당에서 -- '프렌들리 토스트' -- "브런치 음식을 저녁에 먹는 거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말하면 나, 하루 종일 팬케이크만 먹어도 살 수 있어." "전에 지중해 음식만 먹고도 살 수 있다고 안 했어?" "그것도 좋지." -- 팔라펠 -- 병아리콩을 갈아 향신료와 함께 튀겨 낸, C와 네가 둘 다 사족을 못 쓰는 -- 버거를 먹으며, 너는 네가 살아온 이력도 C에게 얘기해 주었다.

대학에서는 1년을 일찍 졸업해서, 3학년이 4학년과 구분이 안 되는 삶을 한동안 살았다고. 부모님 돈은 아껴 드렸으니 후회는 없지만 선택지가 있었다면 아마 4년을 꽉 채우고 5년 과정의 학석사 과정까지 마쳤을 거라고. 돈만 있다면 평생, 학부생으로 살았을 거라고. 미술사와 종교학 같은 것을 공부해서, 아마도 슬라브 정교의 성상[icon]을 공부하지 않았겠나 싶다고.


자기 아버지 생일도 잊어버리기 일쑤라는 C는 그래서 잊어버릴 일 없는 네 생일을 좋아한다.

다만 네 생일을 자주 잊는 너는 같은 이유로 C의 생일을 좋아할 수 없다.

열일곱 살 -- 만이 아닌, 한반도의 셈으로 -- 이후로 가족이 너의 생일을 기억한 적이 없기에 너는 이 우연이 반갑기도 하고 껄끄럽기도 하다. 너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잊고 이틀쯤 지난 날, 너의 어머니는 머쓱하게 용돈이 든 봉투를 내밀었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했었는지 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굽이 높은 구두를 처음으로 지하상가 어딘가에서 샀었던가.

그 싸구려 구두는 가격이 무색하도록 발에 참 편했던 것만 너는 기억한다.


스물네 살의 생일은 멋진 남자와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너는 생각한다.

대학원생 월급으로는 터무니없는 레스토랑에서 생일 저녁을 먹기로 약속해 두고는 정작 입고 갈 옷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는 것도.

C가 손을 떼지 못하는 네 몸의 어느 구석이 그렇게 매력적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 거울 같은 창문 -- 전신거울이 생각보다 비싼 가구라는 것도 너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 에 네모진 어깨를, 평범한 가슴을 -- "네 가슴 정말 예쁘다, 그거 알아?" "엄청 작은데도?" "엄청, 까진 아니야. 그리고 너도 작은 사람이잖아." "음, 알았으니까 옷 좀 마저 입게 해 줄래. 나 곧 수업 가야 해." -- 고찰해 보는 것도.


--


- 나 오늘 웃기는 얘기 들었다.

- 뭔데?

- 우리 과의 어느 커플인가가, 우리랑 포썸을 해 보고 싶다고 그랬다고.

- 푸핫, 누군지 대충 알 것 같아.

- 누굴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잖아?

- 아냐, H라면 그냥 지나가는 말로, 아, K랑 K 남자친구랑 한 번 같이 해 보고 싶다, 충분히 그랬을 거 같아.

- 모르는 일이라니까. 아무튼, 칭찬으로 생각하려고. 불 끌게.

- 괜찮아?

- 음?

- 순간적으로 멈칫, 한 것 같아서, 네가.

- 아, 렌즈를 빼서, 네 표정이 안 읽혔어.

- 아, 음, 네 엉덩이 보고 있었어. 표정은 상상에 맡길게.

- 웃겨 하여튼.


--


C의 스물다섯과 너의 스물다섯은 다른 시간대에 놓여 있다.

그래서 아마도 그와 너는 스물다섯 살의 바보짓을 함께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바보가 아닌 것 같기도 해서 -- C 스스로는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 "너 눈꺼풀이 반짝거려, K." "요정 가루 [흩어진 아이섀도우를 닦아내며, 너는 fai-ry dust의 ai-ry를 과장되게 늘려 발음한다]." "나한테 마법이라도 걸었나 봐, 요정 아가씨." -- 너 역시도 조금은 덜 바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연애에 있어서는 누구든 바보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C의 스물다섯 살 여름은 냉방이 풀로 가동 중인, 환풍구의 공기 흐름이 이상해 늘 날파리가 흘러들어온다는 연구실에서 -- 더운 것을 못 견디는 C는 에어컨 유닛이 없는 공간을 지독히 싫어한다 -- 너의 스물다섯 살 여름은 서울과 모스크바와 상트뻬쩨르부르크에서 흘러갔다. C와 너의 관계만을 두고 보면 큰 고민은 없는 여름이었다. 스물다섯의 바보짓은 고로 너에게만 국한되는 것이다.

실상 이 여름의 이별은 바보짓이 아니라 네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너는 치사한 여자들이 등장하는 노래를 돌려 들으며 --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너 하나만 남았었지만 내가 모든 것을 잃었기에 너는 떠났네" -- 너 자신을 위한 면죄부를 중세 주교처럼 써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너는 슬그머니 화가 날 때도 있다. 모든 것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잃고 당구나 치러 다니는 사람, 모든 것을 잃고도 애인을 위해 꽃다발 살 돈을 부지런히 모으는 사람과 모든 것을 잃고 낭만주의의 히어로인 양 뻐기는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낭만주의의 히어로 행세를 하고 싶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예쁘장한 여자나 부지런히 알아 보시라고. 그 얼토당토않은, 남자의 자존심이라고 부르는, 쓸모라곤 하나도 없는 구체[球體]를 맛세로 찍어 블랙홀로 보내고 싶어지는, 그런 때.)


새 연애의 언어를 배워 가는 것은, 그 언어가 너의 모국어가 아닐 때는 더더욱, 힘든 일이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너는 아직도 피곤한 저녁이면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의 말이 버겁고 시끄럽다. 귀와 입을 닫고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싶다. 그렇게 삶의 문법마저 엉망이 되어 가는 날이면 C는 -- 네 귀에조차 아프게 부스러지는, 억양과 문법의 망가진 파편을 오롯이 안고 -- 너를 꼭 끌어안는다. 너는 모종의 대답으로 C의 가슴팍과 목덜미와 어깨를 멍이 들도록 깨문다.

(그렇다고 네 모국어가 더 이상 익숙한 것도 아닌 것이야말로 아이러니다. 공항에 들어서 익숙한 언어가 왁자지껄 들릴 때면 네 귀는 고막이 액화된 질소에 담긴 양 서늘해 온다.)

너는 아직 열세 살인 막내 여동생과 이야기를 하다가 -- 그녀의 이상형은 "키가 적어도 180센티미터는 되고, 운동 선수 출신에 공부도 잘 하는 잘생긴 금발머리나 갈색 머리의 남자"란다 -- 픽 웃고는, 너도 초등학교 열두 살, 열세 살, 열네 살쯤의 나이에는 그런 백일몽을 꾸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너 역시 열두 살, 열 세 살 때에는 많은 꿈을 꿨었다. 막연히 이 대학에 -- 정확히는 이 학교 로스쿨에 --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아마도 막내동생의 공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과 연애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삶은 가끔 막연한 꿈에 따라 흘러가기도 한다, 고 너는 생각한다.


--


- 가끔 네가 진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K.

- 진짜 사람의 반대는 뭘까, 상상의 사람? 상상의 여자친구를 뒀다니, 그거 좀 슬프다.

- 나한텐 딱이지.

- 예전에 학부 때,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와서 말을 시키더라고. 요즘 같으면 무시했을 텐데, 그 때는 그럴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몰라서, 또 그런 일이 이 나라 건너와서 하도 자주 생기니까 그게 일종의 문화적 차이인 줄 알고, 꼬박꼬박 대답을 해 줬었어. 얘기를 하다가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이 남자가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그러는 거 있지, 저기, 그러면, 그 눈꺼풀 진짜예요? 그래서 그랬지, 아니, 당연히 상상의 쌍꺼풀이죠.


--


연애의 언어를 새로 만들어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모종의 사회계약처럼 성립되었다는 익명의 언어, 중립적인 언어와는 다르게 연애의 언어는 둘만이 공유하는 사적인 방언이다.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언어로부터 신택스를 허물고 단어들에 새 정의를 부여해 새로 지어내는 건축물 같은 것.

비단 언어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기념일을 만들고, 생일을 기억하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시간과 달력의 재정비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동안만 공유되는 어떤 역사를 써 나가는 과정이다. 

C는 그래도 기념일 하나쯤 갖고 싶었던 모양인지, 처음 키스한 날짜를 기억한다는 너의 말에 반색을 한다.

- 그 날 우리가 뭘 했는지는 거의 다 기억하는데, 날짜는 기억이 안 나지 뭐야.

- 내가 아이디를 안 가지고 와서, 원래는 데달루스에서 맥주 한 잔 하려던 걸 토스카노에서 디저트를 시켜 먹었었지.

- 버스 타기 직전에 너한테 키스했었어, 맞아.

네 기억은 사실 그것보다 훨씬 자세하다. 너는 블루베리 타르트, C는 티라미수를 주문했던 것, 일본어로 된 고양이 기르기 게임에 대해 C가 이야기해 준 것 -- "나 그 게임 아는 것 같은데, 고양이들이 다 귀여운 멍청이같이 웃고 있는 그 게임 말이지?" "맞아, 그거야. 처음에는 영어 번역이 안 되어 있어서 일본어로 더듬더듬 실수도 많이 해 가면서 했었어." -- 레스토랑이 문을 닫을 때까지, 웨이터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 버스 정류장에서 기숙사가 얼마나 머냐고 물어보아 왕복 30분은 될 테니 데려다 줄 생각 말고 그냥 집에 가라고 네가 C의 등을 떠밀었던 것. 그 때까지만 해도 너는 C를 귀여운 공대생 정도로 생각했었던 것, 느닷없는 데이트 신청 역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받아 주었었던 것. C의 당시 기숙사를 거쳐 M대까지 직행하던 1번 버스가 도착하자, 네게 키스해도 될까, 하고 C가 물었던 것, 발꿈치를 들어 참새가 모이를 쪼듯 가벼운 입맞춤을 했던 것.

(모직 피코트와 스웨터 아래의 단단하고 따뜻한, 늘 토끼풀꽃이 가득 핀 풀밭처럼 좋은 냄새가 나는 C의 몸은, 그 토요일로부터 다시 일주일 뒤인 금요일에 발견하게 되는 것.

C는 돈 들릴로의 '언더그라운드'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는 중이었던 것, 그 책들이 창틀에 놓여 있던 것.

너는 노란색과 주황색과 흰색의 꽃이 무늬로 새겨진 얇은 남색 쉬폰 블라우스를 입고 있던 것. 네가 소매의 단추를 풀어 블라우스를 머리 위로 벗자 C가 네 반바지와 타이즈를 가리키며, 이쪽도, 라고 말했던 것. 네가 아무 말 없이 옷을 벗는 동안 C 역시 티셔츠와 청바지를 벗어 냈던 것. 어깨를 움츠려 가슴을 살짝 가린 채 연두색 시트가 깔린 침대에 걸터앉은 너를 지그시 바라보던 C가 말했던 것, You are absolutely gorgeous. 내일도 아침 일곱 시 반까지 랩에 가야 해? 하고 네가 물었던 것, 아니, 네가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날 거야, 하고 C가 대답했던 것. 그 날이 성 금요일이었던 것, 네가 그것을 굳이 C에게, 올리브 빛, 아니면 황갈색의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해 주었던 것, Today is Good Friday. C가 큭큭, 하고 웃으며 대답했던 것, Whatever turns you on.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라고, 네 몸 곳곳을 한참 손끝과 혀끝으로 훑던 C가 말했던 것, 네가 대답 대신 양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한 번 까닥인 것. C가 네 어깨를 양 손으로 부드럽게 눌러 천천히 침대에 눕혔던 것, 그 몇 초가 네게는 영겁과 같이 느껴졌던 것, C가 서랍을 뒤져 콘돔을 찾는 동안 너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는지 몰라 고개를 돌리고 벽을 바라보았던 것.

마침내 C가 네 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던 것, 너도 알지 못했던 몸 속 깊은 곳 어느 신경의 존재를 처음으로 느꼈던 것, 너의 호흡이 폐포가 터져 나갈 듯이 가빠졌던 것, C의 등과 목덜미를 너도 모르게 손톱으로 긁어 놓았던 것. C가 마주 -- 침대와 네 어깻죽지 사이로 손을 넣어 -- 끌어안았던 네 몸과 옆구리에도 손톱 자국이 남았던 것.

그 때도 C가 물었었던 것 -- 혹시 내가 너를 아프게 하니. 아니. 두 번째의 섹스를 끝내고 C가 다시 물었던 것, 진짜 안 아픈 거야? 내가 되물었던 것, 아니, 왜, 내가 아파하는 것 같았어? 그냥, 네가 너무 작고 예쁘니까, 걱정이 됐어. 하나도 안 아파. 다행이야, 그럼.

사실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느낌이었다고, 그 말을 C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것.

아침에 일어나 세 번째의 섹스를 마치고는 C가 팬케이크를 산더미처럼 구워 내놓았던 것. 바닥 사방에 흩어진 옷가지를 하나씩 주워 입고 식탁이 있는 거실로 나온 너를 C가 웃으며 맞아 주었던 것, C의 룸메이트과 함께 에셔와 나보코프 이야기를 했던 것, 페일 파이어의 구조를 설명해 주려던 네게 C가, 아, 나 그 책 읽었어, 라고 대답해 너를 놀라게 했던 것. 괴델, 에셔, 바흐 이야기를 했던 것.

그 날 아침에는 비가 부슬거리며 살짝 비쳤던 것. 신발을 신다 말고 고개를 돌린 C가, 나 네가 정말 좋아, 우리 또 볼 수 있지? 하고 물었던 것. 신발을 마저 신고 까만색 방수 바람막이를 걸치고는 너를 센트럴 스퀘어 역까지 바래어다 주었던 것. 생각 없이 달리던 지프차 한 대가,  C에게 물을 흥건히 튀겨 놓았던 것. 당황한 네가 괜찮아? 하고 묻자, C는 씩 웃으며, 괜찮아, 오늘 샤워 안 해도 되겠네, 라고 대답했던 것.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의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얘 말야, 나 조금, 반할 것 같아, 라고 선언했던 것. 남자 보는 눈을 시궁창에 박아 두고 다닌다고 늘상 너를 놀렸던 네 친구들은 네 말을 믿지 않았던 것.

지금도 -- 서로가 바쁜 주중의 아침이면 알람을 눌러 끄고 이십 분쯤 서로의 몸을 안타깝게 어루만지고 머금는 것 -- "I cannot think of anything more beautiful than you." -- C가 아침 샤워를 마치고 돌아와 네 몸 위에 젖은 몸을 포개는 것 -- "출근 안 하고 싶다, K. 이대로 하루종일 있고 싶어." -- 가끔 너는 그 금요일 밤의 기억을 꺼내 손바닥 위의 구슬처럼 굴려 본다는 것도.)


--


- 너 지금 옷을 너무 많이 입고 있는 거 알지, K. Unacceptable.

- 됐어?

- 훨씬 낫네.

- 훨씬 낫다, 고. 옷을 입고 있으면 별로라는 거야?

- 아 이런. 음, 이미 완벽한 걸 더 개선시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넌 방금 그걸 해냈어.

- 윽.

- Well, I tried.


--


그 새 신택스라는 것은, 생각보다 빨리 만들어지기도 한다.

존재를 새로 짓는 만큼 언어도 새로 지어진다. 언어와 세계의 자전축을 다른 사람의 언어에서, 몸에서, 눈동자에서, 머리카락에서, 손가락에서 쉽게 재발견하는 건 네 재주다.

때문에 너는 C가 좋아하는 주황색의 양모 털실과 장미목 뜨개바늘을 주문해 목도리를 -- 머플러, 마후라, 스카프, 목도리는 모두 같은 말일까? -- 떠 나가고, C가 좋아하는 퓨처리즘 풍의 재즈를 골라 듣기 시작한다. 에셔의 드로잉에서 대칭 구조를 찾아내야 한다는 C의 숙제를 함께 풀고 -- "이게 재미있는 데이트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사귀고 있는 네가 좀 불쌍해지네." "그 제안에 엄청 신나 하는 여자를 만나는 네가 더 불쌍해." -- 중합체[重合體, polymer]의 정의를 백과사전에서 찾아 본다.

다음 달에는 고양이를 한 마리 집으로 데려올 궁리도 해 본다.

연애의 문학을 -- 왕조가 멸망할 때에 불타 없어질 실록 같은 것을 -- "그냥 신발 벗어 놓고 엉킨 건 아침에 풀면 안 돼?" "오늘 풀고 자야 할 것 같아, 거의 다 풀었어." "그럼 내기 할까, 그 신발끈, 못 풀면 섹스 없음." "아니, 나 그 내기 싫어, 잠깐만, 잠깐만." -- 그렇게 너는 다시 써 내려 간다.

적어도 시트와 이불에 감싸여, 잠에서 설핏 깨어날 때마다 서로의 어깨와 뺨과 이마와 입술에 -- 어디든, 새벽 어스름과 졸음을 헤치고 찾을 수 있는 서로의 몸 어딘가에 -- 입술을 가져다 대고는 다시 잠드는 그런 밤이면, 꼭 맞닿은 네 몸과 C의 몸 사이 어딘가에 소우주 하나쯤 존재할 거라고, 충분히 믿을 수도 있다는, 그런 이야기다.  


귀엽고 야한 연애 이야기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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