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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비가 그치듯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결혼 이야기 어쩌다 보니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연애를 하다 보면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 모양이다.)심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이 사람과 결혼하면 어떨까, 하고 둘 다, 생각을, 종종, 한다는 것. - 혹시 저번에 아기 생길 뻔 했던 일 때문에 생각해 본 거야? -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을 한 지 좀 됐어. 내일 프로포즈를 하고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놀란 표정 안 지어도 돼. - 내일이라도 아마 예스를 할지도 몰라. Because I really like you, and I can try to be a better person for you. - I don't want a better you, though. I like you as you are.풀리지도 않을 연애를 하면서 허구한 날.. 더보기
어느 밤 -- 타협과 샤워와 누드 - 작년 이맘때는 내 기분이 날씨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받는 줄 몰랐어. - 캘리포니아엔 날씨가 없어서? - 2월, 3월엔 우울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진짜 힘든 거 있지. 근데 4월이 되니까 바보같이 종일 실실 웃고 다녔었지. - 글쎄, 4월엔 아마 다른 누군가의 영향이 있었던 것도 같고. - 세상에.- 왜 때려?- 좋아서. -- T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단다. 현재 비행기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도시에 사는 남자친구 -- 그를 일단 H라고 부르기로 하자 -- 오는 가을에 T와 네가 사는 도시로 이사를 오기로 되어 있었다. 오는 가을, 이라고 하는 것도 T가 몇 차례의 유예를 준 끝에 -- "작년 이맘 때는 가을에 온다고 하더니, 가을이 막상 되니까 지금 직장에서 일 년 단위를 꽉.. 더보기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우리, 를 생각하기가 어렵다. 너와 내가 만나면 우리가 된다고는 하지만, 1인칭 복수라는 것은 애매한 이야기다. 감히 우리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보라 때문에 너는 C의 집에서 주말을 보낸다. 거의 비어 갈 고양이의 물 그릇이 눈에 밟히지만 C가 끓이는 양파 수프 냄새도, 침대도 거역할 수 없이 따뜻한 탓에 너는 네 자신이 고양이인 양 C의 방과 주방을 오가며 -- 이따끔 기지개를 켜고, 20분 정도 낮잠을 자기도 하고, C가 만들어 놓은 음식들을 한두 점씩 집어 먹고, C의 룸메이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 주말 내내 노닌다. - 나 주말 내내 이렇게 있어도 괜찮아? - 네가 좋고, 주말을 너랑 보내는 것도 좋아. - 그럼 다행이야. 우리는 이렇다,.. 더보기
금연애를 해본다면 금연애를 해본다면 슈퍼볼 중계를 아메리칸 뽀-이 일곱 명과 함께 보았다. 다가오는 발표 때문인지 C는 다소 압력을 받고 있는 눈치다. 토요일 밤 그 압력을 온몸으로 다 받아낸 너는 화장을 지울 기운도 없어 C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묻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느릿느릿 둘 다 눈을 떴을 때는 -- "Morning, handsome." "Morning." "What time is it?" "Eleven." "What?!" "Yeah, I thought it'd be, like, nine." "How'd this happen?" -- 해가 이미 중천이다. 피로 때문인지 전날 먹은 짠 음식 때문인지 눈꺼풀이 잔뜩 부어 있는데, 쌍꺼풀이라는 개념조차 잘 모르는 C는 아마 -- "너 오늘따라 되게 예쁜데 왠지는 모르겠.. 더보기
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를해야한다 (Feat. Privilege of Being, by Robert Hass) 0. - 언니는 평생 인터넷 없이 사는 거랑 평생 연애 안 하는 것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뭘 택할 거야. - 연애 안 하면 나 죽어. 난 죽을 때까지 연애를 할 거야. 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연애를해야한다. 연애는 나의 형이상학. 필멸의 시간 속에서 불멸의 환상은 가히 꿀맛이다. 사실 오비드의 은 필멸과 불멸 사이의 음담패설이다. 죽지도 늙지도 않기에 하루 종일 섹스를 하거나 질투를 하거나 섹스와 질투의 후환을 열심히 처리하는 -- 열심히 똥을 치우는 -- 신들과, 인간처럼 자신의 필멸성[mortality]에 항시 자각하고 있지 않기에 신들과 진배없이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필멸자이지만 불멸의 싸이키[psyche]를 지닌 축생들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판타지. 냐하항. 1. - 우리 엄마가 너 맘에 .. 더보기
음담패설에 대해 음담패설에 대해 음담패설을 하지 않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섹스에 대한 얘기가 더 이상 야한 얘기가 아니게 된 지금은 아마 음담패설이라는 것 자체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유희에 대한 염원을 담아 음담패설의 정의와 기능과 문맥을 탐구해 보기로 한다. 음담패설[淫談悖說]은 '음탕하고 덕의에 벗어나는 상스러운 이야기'를 뜻한단다. 요컨대 그것은, 상상 속 어떤 청자가 그것이 '덕의'에 어긋난다고 판단할 법한 이야기여야 하며, 음담패설의 즐거움 중 상당한 부분이 그 도덕적 금기성에서 우러나온다. 그 이야기는 또한 음탕해야 한다. 즉, 화자와 청자의 생각에 모두 음란하고 방탕한 이야기 -- 일종의 일탈의 의미마저도 담겼다고 볼 수 있는 -- 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저 정의에는 한 가지 문.. 더보기
삶과 삶의 조우 삶과 삶의 조우 절필도 금주도 가족여행 덕에 실패다. 블랙러시안을 만들어 마시려다가 깔루아 값을 보고 포기한다. 보드카에 진저에일을 섞어 들이킨다. 물에 물을 섞은 듯 싱겁다. C에 대한 동생의 첫인상은, 그러니까 --"와, 난 나보다 머리 큰 사람 처음 보는 것 같아."하 참 나. -- 먹을 것 천지인 퀸시 마켓까지 구경을 가서도 네 식구들은 끝끝내 시장 맞은편의, 네 생각으로는 턱없이 비싼 (김치볶음밥에 17달러라!) 한식당으로 향했다. 통역과 주문을 위해 벽 쪽 대신 홀과 가까운 구석에 앉아 너는 웨이트리스에게 주문을 넣었다. 김치볶음밥 세 개, 돌솥비빔밥 하나. 싫다는 너의 만류에도 네 접시에 어머니는 비빔밥을 다섯 숟가락이나 덜어 준다. 밥을 젓가락으로 입 안에 깨작깨작 밀어넣으니 익숙한, 고소.. 더보기
새해라면 절필 새해라면 절필 새해에는 이 언어를 버리고 싶다고 너는 막연히 생각했었다.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네 본명조차 낯설어진 요즈음에도 너는 모국어로 연애를, 식사를, 모호한 감정들을 인지한다. 모국어를 잊으면 다소 건조한 연애쯤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C는 네게 유화 도구를 한 벌 -- 나중에 C의 화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C가 난데없이 메시지를 보내 유화를 그리려면 뭐가 필요하냐고 물었었단다 ("붓이랑 물감 말고 또 뭐가 필요한가? 하길래 내가 그랬어요, 자, 종이랑 펜을 준비하고, 내가 말하는 것들을 모조리 받아 적어.) -- 선물해 주었다. 미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너는 무턱대고 페인팅나이프를 하나 집어들어, 젯소를 바른 캔버스에 울트라마린 물감을 두텁게 얹었다. 캔버스.. 더보기
ps. 눈의 물이 눈물인지 눈물인지는 도무지 모른답디다, 우리말의 장모음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데요 추운 날이면 여지없이 품고 안고 어루만지고 비루먹은 개처럼 피가 나도록 핥을 기억이 있다는 것 참 다행 아녜요 내겐 그래요 그렇네요 시간의 기념비처럼, 얼어붙은 돌에 혀를 갖다 대어 떼어내려면 혀의 절반이 떨어져 나가는 시간들처럼 당신이 그립지 않아도 그 시간들이 아름다워요. 당신과 나는 찬 혀에 섭씨 칠십오 도의 단팥을 가져다대어 화상을 입고는 했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성에는 겨울의 곰팡이랍니다 나는 곰팡이 낀 몸을 양 팔로 감싸안고 박제가 되어요 일, 이, 삼, 사, 오. 어쩌면 육 또 어쩌면 칠, 추억이 얼어붙는 불 같은 시간을 당신께 소포로 보내요, 만져지나요 점도도 점액도 없는 결정체로 보아하니 .. 더보기
오픈 유어 --- 오픈 유어 --- 열쇠 돌아가는 기척에 고양이가 벌써 방문 밖으로 뛰쳐나간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너는 깜짝 잠에서 깨어난다. - Hey.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나 작업을 할 생각에 컨택트렌즈도 빼지 않고 잠이 들어 시야가 침침하다. 혀도 뇌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너는 영문을 모른 채 흐릿한 실루엣에 초점을 맞추려 애쓴다. 스탠드 불빛에 찬 겨울밤 냄새과 네가 잘 아는 모직 코트 냄새가 몽롱히 섞여 온다. 그림자가 익숙한 몸짓으로 옷을 슥슥 벗어내고 네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춘다. - 아, 나 오늘 여기서 잘 거야. Q가 친구들을 데려와서 파티를 하는 중인데 시끄러워서 잠이 들 수가 없어서. 깨워서 미안해. 금방 양치하고 올게.C가 화장실에 간 사이 너는 꾸역꾸역 몸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