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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자식 이야기 할아버지는 이미 묫자리를 정하셨단다. 사람이 한 번도 묻힌 적이 없는 자리는 수천만 원 수준으로 비싸고, 2-3년 전에 사람을 묻었다가 이장한 자리가 그나마 그 다음 등급이란다. "아부지, 채린이 이제 가면 못 봐요." "왜 못 봐, 시집 갈 때 오겠지." 고모는 너를 옆으로 따로 불러내어 호주머니에 오만 원 짜리 지폐 몇 장을 찔러 넣어 주었다. 너 러시아 가기 전에 한 번 더 와라. 진짜로, 못 봐, 그러고는. 그것이 단순한 용돈 차원이라고는 너는 -- 아마도 네 양심이 저린 탓이겠지만 --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제 시간 내는 일에 대한 돈을 미리 챙겨 받고서야 부모님을 찾아 뵙는 호로자식, 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식사하신 그릇을 가져다 씻는다. 네가 살아오면서 할아버지의 식기를 닦아 본 일.. 더보기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을 청하는 두 사람의 팔다리에 대한 고찰 A proposal: 누군가에게 안긴 채 잠든다는 것은, 일정 몸집 이상으로 자라난 생명체에게는 다소 불편한 일이다. 사지를 어떻게 엮고, 또는 한쪽으로 접어 치워 둔다 해도, 팔과 다리가 한두 개쯤 남아도는 느낌일 수밖에 -- 전에 아주 잠깐 만났던 누군가는, 이런 느낌의 한 부류를 "t-rex syndrome"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한 팔을 뻗어 상대를 감싼다면 다른 팔은 두 몸 사이의 간격에 맞추어 움츠릴 수밖에 없다는 것. -- 없다. 그것은 비단 팔뿐만 아니라 다리에, 또 가끔은 목과 머리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과 우로보로스의 차이는 인간의 팔다리에 있다고 말했다. 둥근 우로보로스가 그 자체로 완전한 우주의 형태라면, 인간의 팔다리는 -- 다소 우아하지 못한 모양새로 -.. 더보기
결혼 이야기 어쩌다 보니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연애를 하다 보면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 모양이다.)심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이 사람과 결혼하면 어떨까, 하고 둘 다, 생각을, 종종, 한다는 것. - 혹시 저번에 아기 생길 뻔 했던 일 때문에 생각해 본 거야? -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을 한 지 좀 됐어. 내일 프로포즈를 하고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놀란 표정 안 지어도 돼. - 내일이라도 아마 예스를 할지도 몰라. Because I really like you, and I can try to be a better person for you. - I don't want a better you, though. I like you as you are.풀리지도 않을 연애를 하면서 허구한 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