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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호로자식 이야기

할아버지는 이미 묫자리를 정하셨단다.

사람이 한 번도 묻힌 적이 없는 자리는 수천만 원 수준으로 비싸고, 2-3년 전에 사람을 묻었다가 이장한 자리가 그나마 그 다음 등급이란다.

"아부지, 채린이 이제 가면 못 봐요."

"왜 못 봐, 시집 갈 때 오겠지."

고모는 너를 옆으로 따로 불러내어 호주머니에 오만 원 짜리 지폐 몇 장을 찔러 넣어 주었다. 너 러시아 가기 전에 한 번 더 와라. 진짜로, 못 봐, 그러고는.

그것이 단순한 용돈 차원이라고는 너는 -- 아마도 네 양심이 저린 탓이겠지만 --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제 시간 내는 일에 대한 돈을 미리 챙겨 받고서야 부모님을 찾아 뵙는 호로자식, 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식사하신 그릇을 가져다 씻는다.

네가 살아오면서 할아버지의 식기를 닦아 본 일은, 아마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여행이고 무엇이고 다 그만두고 올 여름 한 철이라도 노친네 그릇을 날마다 씻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침과 지문이 네 손에 스미고 찌들 때까지. 

졸업하고는 꼭 한국에 들어와서, 애인도 만들고, 결혼도 외국 남자랑 하지 말고, 한국 남자랑 기왕이면 하는 것이, 이 할아버지 생각에는 좋겠다는 이야기, 에 너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뭔가 뜨거운 것을 눌러 삼켰다.

네, 그래야죠, 라는 대답이 얼른 나온 것도 아니다.


그렇게 종잇돈 몇 장을 얻어 집에 돌아오고는 저녁 내내 너는 C와 맥주 한 잔이 그립다. 쌉싸름한 맥주 몇 모금이면 아마 네 표정도 숨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맥주가 두 잔, 세 잔이 되었을 때 너는 비로소 C를 끌어당겨 물을 것이다, 나, 뭐 슬픈 얘기 하면 들어 줄 테야.

물론 C가 지구 건너편이 아니라 이곳에 있었다 한들 -- 또는 네가 당장 그곳으로 간다고 한들 -- 아마 그에게도 좋은 수는 없을 것이며, 문맥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은 마음도 네게 들지 않을 것이다.

C는 네 우울을 이해한 적이 없다.

이를 보여 웃지 않고 특정 단어를 발음해야 하는 게임 이야기를 듣고 미리 기권을 하는 C는, 그냥, 그런 사람이다. C와 사소한 일로 싸운 적이 있다고 하자 친구들이 물은 적도 있다, 근데, C는 혹시 싸울 때도 싱글싱글 웃니.

와인이나 맥주를 적당히 한 잔 마시고는 C의 머리카락이며 턱이며 가슴이며 엉덩이를 밤새도록 쓰다듬고 싶은 밤, 이라 해도 아마 C는 너의 불면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의 세계들은 번역 가능성의 영역 밖에 있다. 그 모든 언어로도 할아버지와 C의 평행선을 너는 교차시킬 수 없을 것이다. 너는 C를 번역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으로 너를 만나고 싶어 안달을 하신다는 C의 할아버님을 떠올린다. 가능한 것은 늘 너 자신을 번역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우울의 번안 역시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집 냉장고에는 그 흔한 싸구려 맥주 한 캔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