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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대책 없는 여자

대책 없는 여자


도망치듯 살아온 네게, C가 몇 년 뒤에 살고 싶은 곳을 찬찬히 생각해 보잔다.

- 아마 내가 너보다 일찍 졸업할 테니까, 나는 일단 보스턴 근처에 취직해도 좋을 것 같아. C사[社]나 S사는 매사추세츠에도 연구센터가 있고. 그게 아니면 미니애폴리스 주변이나 서부에도 생각해 둔 곳이 몇 군데 있어.

화학 회사에 들어가면 돈을 많이 벌 테니, 네 고양이가 좋아하는 사슴고기 캔도 실컷 살 수 있다는 말에 너는 피식 웃는다. - 나도 사슴고기랑 토끼고기 먹을 줄 아는데. - 넌 키릴만큼 안 귀엽잖아.


살고 싶은 곳이라.

작년 여름 차를 타고 사막과 초원을 몇 시간이고 가로지르던 어느 날, 옆 좌석에 앉았던 누군가 네게 물었었다. - 그럼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에서 여행도 해 보고 살아도 본 거잖아요. 이 다음엔 어디에 살고 싶어요.

너는 늘 내놓던 대답을 내놓았던 것 같다. - 제 분야가 직장이 잘 잡히는 분야가 아니기도 하고, 저는 어느 도시에 가든지 몇 주만 지나면 거기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지역 식재료로 음식 해 먹는 법도 금방 배우고요. 그래서, 아무 곳이든 사실 상관 없어요. 이스탄불이나 홍콩 같은 곳에서 영문학을 가르쳐도 좋고요. 그래도 기왕이면 큰 바다나 호수가 강을 낀 도시면 좋긴 할 것 같네요.

이 모호한 응답을 잘 풀어 본다면, 아마도 이런 뜻일 것이다. - 어디 살고 싶은지 별로 고민하고 싶지 않아요.

주거지에 관한 너의 회피주의는,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철학이며 (- 고민하고 장소를 점찍어 둔다고 그곳에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한편으로는 청소년기에 발병하여 지금껏 사그라들지 않은 고질병이자 (서울 집이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유학을 떠나기 한참 전 일이다) 또 한편으로는 네 독특한 직업윤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묘사한 이상적인 비평가는 그 어느 곳에서도 편히 지내지 않는 사람, 한 문화를 대함에 있어 평생 반쯤은 아웃사이더로 남기를 택한 사람이었다. 자기 집에서 집처럼 편하게 있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도덕의 일부일 것이라고 말한 아도르노나, 자기 안의 타자성을 직시하고 가장 상처 입기 쉬운 무장해제의 상태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기술이라고 말한 크리스테바를 생각할 때,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나 공간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자유이고 축복이라고 은연중에 믿어 왔다.

정주하는 삶이 곧 그런 이기적인 주인의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 오히려 어디에 정착한다 해도 이등시민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 그 어디에 살아도 좋고 어디에든 살 수 있는 삶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어딘가에 머무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날 밤이다.

잠들기 전 귀여운 문자메시지를 한 통 보낸답시고 ("작년 여름에 내가, 베를린이든, 모스크바든, 보스턴이든, 네가 있는 곳에 같이 있고 싶다고 얘기한 거 기억나? 지금도 똑같은 마음이야.")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답은 이랬다. - 너도 나도, 둘이 같이 살 수 있는 곳을 찾으려고 최대한 노력할 거라는 거 확인해서 기분 좋다.

나의 낭만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는 지각[知覺]에 머릿속이 아찔해지고 헛웃음이 터진 것은 그 메시지를 받고 왠지 불편한 마음에 이 난데없는 이물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삼십 분 정도 고민한 후의 일이다.

좋아하는 이, 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 곳에 오래도록, 어쩌면 십 년이 넘도록, 머무른다, 는 가능성이, 연애 초부터 이별 준비를 하는 네게 그 어떤 이국[異國]의 풍경보다 낯설다는 것. 불과 몇 달 전, 내가 혹시 다른 나라로 이사해야 하면 고양이를 부탁한다는 네 말에 C가 묘한 표정을 지었던 것. 여행을 하다가 사랑에 빠져서 여기 남게 되었어요, 하는 이야기를 숱하게 보고 읽었어도 그런 일을 하나의 시나리오로 상상해본 적도 동경해본 적도 없는 것. 혹여 정주[定住]하는 삶을 꿈꾼다 해도 그것은 늘 공간에 대한 상상으로, 그 공간에 항시 거주하는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그 삶의 요소로서 그려 본 적이 없다는 것. 

요컨대, 대책도 계획도 현실감각도 없는 여자, 라는 것.

너와 함께 살고 싶고, 네가 마음의 준비를 마칠 때까지 ("Until I get my shit together?" "I wasn't gonna say that, but, yes.") 기다릴 수 있지만 나중보다는 빠른 게 좋을 것 같다고, 특유의 습관적 실없음조차 없이 말하는 이 사람 앞에, 너는 아연[啞然]하다.

길어지는 해만큼 고민도 늘어진다. 스물일곱이 아니라 다시 열일곱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열일곱 살 때의 바보짓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고 질끈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