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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기후변화와 읽지 못할 책의 무덤과 세상의 끝

요즘 부쩍, 생이 길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글을 읽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그 업이 끝나면 피로한 심신을 책을 읽으며 쉬이고 싶은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렇게 책을 읽는데도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처럼 불어만 가는 것이 더 기묘한 일이다. 한번 펴든 책은 끝까지 읽어야만 하는 성미도 아니다.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책은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얼마나 가벼운 읽을거리든, 주저하지 않고 내려놓는다. 그럼에도 읽을 책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레타 툰베리는 자신의 생이 반도 지나기 전 우리가 아는 모습대로의 지구가 수명을 다할 것을 걱정한다. 어쩌면 내가 죽기 전에 책을 만들 수 있는 나무가 죽어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며, 세상이 드디어 끝에 다다라, 책이 되어 나에게 다가올 수 있는 이야기도 모두 소멸할지도 모르겠다. 학부생 때에, 코맥 맥카시의 <더 로드>를 텍스트로 삼아, 세계의 끝을 맞이했을 때 사람은 어떤 서사를 계속해 나가는가, 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제출했던 것이 기억난다. 인간을 둘러싼 세계 속 사물의 종류와 다양성이 점점 줄어들고, 그 사물들을 가리키는 일에 필요한 언어도 아주 천천히, 멸종을 맞이하여 숨이 멎을 때까지 말라들어가는 짐승처럼, 가늘고 조용한 어떤 속삭임으로 바뀌었다가, 종내는 사그라지는 것이 아닐지. 세계의 끝에는 어떤 이야기, 어떤 시학이, 극한의 환경에서 생존하는 기묘한 생명체처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우주의 얼음장 같은 진공 속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이어 간다는 물곰이라는 미생물을 떠올린다. 수만년 간 쌓아올린 인류 문명이 절멸한다 해도, 그 아무리 초라한 형태의 언어만이 잔존한다고 해도, 그 마지막 인간은 아마 자신을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고,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 죽음의 순간에 시를 짓는 나 같은 인간이라면, 인류의 마지막이 도래하기 한참 전에 죽어 없어졌을 것이라는 쪽이 아마 더 정확한 추측일 것이다.

각설하고, 그렇게 줄어들지 않는 책을, 그래도 일과가 끝나고 한 권씩 힘 닿는 데까지 읽어 보고자 목록을 만들었다. 칠, 팔할이 영어로 된 책이고, 나머지도 거개가 러시아어나 프랑스어나 중국어 서적이다. 네가 좋아하는, 보통화로 글을 쓰는 티베트 작가가 신작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학교 도서관에 책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말로 된 책을 읽은 것이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울의 대형 서점마다 빼곡한 책 중 좋은 책이 많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한다. 

평생을 읽어도 끝이 나지 않을 목록을 그렇게 적어 내려가다가, 몇 년 전 아마도 끝을 맺었을 다른 목록을 떠올렸다.

네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같이 먹을 음식, 같이 찾아갈 음식점을 휴대전화 메모장에 한없이 적어 내려가던 이가 있었다.

우리는 그 모든 음식을, 서울, 서울 근교, 전국 곳곳의 만두집, 국수집, 라멘집을 찾아가 주문해야 했을 그 모든 음식들을, 언젠가 다 먹을 수 있었을까. 너는 그 수많은 만두집을 그와 함께 찾아가기 위해 해마다 비행기를 타고 있었을까.

무덤까지 가져가야 했을, 끝내 먹지 못했을 무수한 만두가, 네 무덤이 될 책 무더기와 겹쳐 보인다.

먹지 못할 음식, 찾아가지 못할 여행지, 같이 보지 못할 영화, 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함께 서서히 타 들어가는 삶을 상상해 본다. 사실 모든 삶이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함께 보고, 먹고, 경험하고 싶었던 것을 가능성, 소망, 추억이 되지 못한 추억으로 남겨두고, 결국 세상에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 형체 없는 그 모든 가능성들은, 그것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이들이 지상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유령처럼 세상을 맴돈다는 것.

올해도 너는, 차를 몰고 해바라기 밭에 가는 대신, 일주일치 식료품을 사 들고 돌아오는 길에 뉴잉글랜드산 해바라기 다섯 송이를 사 들고 돌아왔다.

세상의 끝은 어쩌면, 한없이 적어 내려가던 만두집의 이름들이 의미를 잃고 증발했던 어떤 날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읽고 싶었던, 그러나 백 년, 이백 년을 더 살 수 있다 해도 다 읽지 못했을 책들의 그림자를 베고 죽는 것은 슬프지 않다. 다만, 이 무덤 같은 책의 목록을 들여다볼 때, 멸망하여 얼어붙은 고요한 세상은 사실 꿈의 무덤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

지금 이 순간도 정적에 귀를 기울이면 볼 수 있다는 것.

사실 온 세상이 이미 꿈의 무덤이라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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