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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 -- 타협과 샤워와 누드 - 작년 이맘때는 내 기분이 날씨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받는 줄 몰랐어. - 캘리포니아엔 날씨가 없어서? - 2월, 3월엔 우울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진짜 힘든 거 있지. 근데 4월이 되니까 바보같이 종일 실실 웃고 다녔었지. - 글쎄, 4월엔 아마 다른 누군가의 영향이 있었던 것도 같고. - 세상에.- 왜 때려?- 좋아서. -- T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단다. 현재 비행기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도시에 사는 남자친구 -- 그를 일단 H라고 부르기로 하자 -- 오는 가을에 T와 네가 사는 도시로 이사를 오기로 되어 있었다. 오는 가을, 이라고 하는 것도 T가 몇 차례의 유예를 준 끝에 -- "작년 이맘 때는 가을에 온다고 하더니, 가을이 막상 되니까 지금 직장에서 일 년 단위를 꽉.. 더보기
온도적정 북쪽 하늘을 면한 작은 방, 옥탑은 아니되 가장 모서리의 방, 그러니까 가장 날카로운 방. 하늘을 찢고 들어가는 방에서 5년이 지났다. 그 중 3년은 방에서 살지 않았으니 아직 낯설다. 여전히 방에서는 잠만 잔다. 날이 가도 밤은 항상 추웠고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독일어에서 말하는 'Es zieht'(직역하면 It pulls)가 바로 이렇게 외풍이 들어오는 상황이다. 누가 무엇을 당기고 있길래 바람은 쉴새 없이 스며드는가. 와류는 구석에 몰린 채 언제든 벗어날 기회만을 노렸다. 겨울바다를 꿈꾸는 것들이 허공에서 헤엄치다가 따뜻한 곳에 끌려 옹기종기 모였다. 공중을 헤엄치는 상상, 아주 오래된 류의 상상이지만 해본지도 오래된 상상이다. 공기는 충분한 부력을 제공하지 못하고 중력의 눈은 매섭다. 어찌하여 .. 더보기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우리, 를 생각하기가 어렵다. 너와 내가 만나면 우리가 된다고는 하지만, 1인칭 복수라는 것은 애매한 이야기다. 감히 우리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보라 때문에 너는 C의 집에서 주말을 보낸다. 거의 비어 갈 고양이의 물 그릇이 눈에 밟히지만 C가 끓이는 양파 수프 냄새도, 침대도 거역할 수 없이 따뜻한 탓에 너는 네 자신이 고양이인 양 C의 방과 주방을 오가며 -- 이따끔 기지개를 켜고, 20분 정도 낮잠을 자기도 하고, C가 만들어 놓은 음식들을 한두 점씩 집어 먹고, C의 룸메이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 주말 내내 노닌다. - 나 주말 내내 이렇게 있어도 괜찮아? - 네가 좋고, 주말을 너랑 보내는 것도 좋아. - 그럼 다행이야. 우리는 이렇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