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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16 페스츄리 봉투에 적다 페스츄리 봉투에 적다 차고 슬픈 것이 어른대는 날이면 생각이 새끼를 친다 이 더운 고장 창가에는 냉기가 감돌지 못하여도 방 한켠에 소복이, 머리카락과 엉기어 가는 연필 꾹꾹 눌러 흰 편전지에 담은 네 목소리에서 먼지를 털어 볼까 하다가 문득 참는 것이다 국방색이 가득한 막사에서 밤을 잘라 편지를 썼을 너를 생각한다 혹시라도 반송되면 우표 좀 더 붙여 꼭 부쳐 달라고 봉투에 눌러 당부해 적은 말과 너의 어머님의 얼굴을 함께 생각한다 편지와 시 나부랭이와 빗소리 섞인 피아노 음악을 네 속에 심어두고 물 주어 기른 사람은 아마도 나였을 것인데 그 씨앗이 무엇이 될지, 그때 나는 아마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세월의 지층을 헤집으며 나는 또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임을 세월은 갈라지고 합쳐지고 다시 갈라져 가는 것.. 더보기
#15 대안적 사랑 원고번호 1 작희대안적 사랑(같이 읽으면 좋은 책: 알랑 바디우, 사랑 예찬)I recognize you means that I cannot know you in thought or in flesh. The power of a negative prevails between us. I recognize you goes hand in hand with: you are irreducible to me, just as I am to you. We may not be substituted for one another. You are transcendent to me, inaccessible in a way, not only as ontic being but also as ontological being (whic.. 더보기
일반적 희극 1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푸줏간, 거대한 고깃덩어리 사이에 하얀 시트를 씌운 침대 하나가 놓여 있다. 축축한 고기 사이로 시트가 희게 빛난다. 남자 1과 여자, 무대 양쪽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걸어나온다. 침대 양 옆에 고기를 찍는 갈고리가 하나씩 놓여 있다. 남자 1과 여자가 그것을 집어들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여자 실리카겔의 교훈을 알아? 남자 1 뭔가 좀 먹었으면 좋겠어.고깃덩어리 하나가 천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여자 나를 먹어. 먹어.남자 1 먹을 것이 없어.여자 [자리에서 일어난다.]바다사자가 말하네, 난 너희를 위해 울지, 너희를 가여이 여기지, 울며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는 그 중 큰 것들을 골라냈지, 눈물 줄줄 흐르는 눈가를 손수건으로 훔쳐내며. 목수는 말이 없지 -- 내 태반.. 더보기
#14.5 나는 원고번호 1 작희나는그의 인생에 똥이었다. 더보기
#14 막음과 마감 원고번호 1 작희막음과 마감 (모 후배가 공유한, 사랑과 죽음과 마감은 막을 수 없다는 말을 보고 도서관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생각한 글이다. 그동안 차마 소수점 이상으로 글 번호를 매길 수가 없다가 오랜만에 뭔가를 올린다. 배설은 역시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오게 되는 곳이다. 제목을 제대로 붙이자면 사랑과 죽음과 마감이라는 말을 모두 넣어야 하겠는데, 그랬다가는 당초에 글을 읽지도 않을 사람이 많을 것 같았다.) 마감, 이라는 단어는 그 어감과는 다르게 순우리말이다. 막음, 과 뿌리를 나누는 말(막장과도 물론 관련이 있다)이지만, 굳이 의미를 잘 더듬어 생각해보면 마감 쪽이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사촌일 것이다. 막다는 동사는, 막(끝)에 이르게 되는 것을 어딘가에 부딪혀 중단하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 더보기
#13.95 근황/ radioactive decay로서의 삶, 에 관하여 배설의 화석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작희 원고번호 1Radioactive Decay로서의 삶, 에 관하여 눈을 감으면 절로 눈물이 나는 때가 있다. 요즈음이 좀 그렇다.비교문학199 세미나는 네 명이 듣는 수업이다. 파키스탄-우크라이나 혼혈의 아이샤는, 학기 초 조기졸업 예정자인 내가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을 때 세 명보다는 네 명이 낫다고 말해 주었다.레이첼은 동부의 보딩스쿨을 졸업하고 서부로 대학을 왔다. 전형적인 미국 가정에서 자라 조금 비전형적인 전공을 택했다.알베르또는 엘살바도르 이민 가정 출신이다. 뉴저지에서 자랐고, 나이를 세는 숫자에 -teen이 붙자마자 여자친구를 사귀고 갈아치우기를 반복한다는 여느 라티노 소년들과는 달리, 알베르또는 공부벌레요 시인이었고, 그래서 여러 남자 친척들은 그런.. 더보기
#13.25 한심한 남자를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원고번호 1 작희한심한 남자를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형용사 「…이」 정도에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서 딱하거나 기막히다.~ 네이버 국어사전 나는 한심한 남자가 좋다.그건 아마도 그냥 남자가 좋다는 뜻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한심한 남자가 좋다. 보고 있으면 피식 웃음이 나오는데, 본인은 왜 내가 피식 웃는지를 잘 모르는--그러니까 뼛속까지 한심한--그런 사람이 좋다.딱히 그런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다는 뜻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심한 남자와 연애를 제대로 시작하라고 하면 그 한심함이 좋은 내가 더 한심해져서 아마 거절할 것 같다. 다만 연애를 하다 보면 한심하지 않았던 남자도 점점 더 한심해 보이고, 그 한심함을 '기막혀'하지 않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한심한 것을 알고 무엇이든 시작하는.. 더보기
#13 들기름으로 부친 계란후라이 원고번호 2 작희들기름으로 부친 계란후라이 겨울의 집 냄새는 고소하고 따뜻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아직 사춘기에 접어들지 않은 동생들의 몸 냄새와 섞이고 음식 냄새와 섞여 밥 뜸 내음처럼 모닥이며 피어오른다. 사람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공항에서 칼국수가 먹고 싶지 않느냐고 묻던 엄마의 말은 만류하고 미국 땅을 밟자마자 한국에 있을 때에는 손도 안 댔던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 물론 내가 칼국수를 먹고 싶다고 대답했어도, 나는 탑승 마감 시간을 1분이나 넘겨 보딩을 했기 때문에 아마 식사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공항에 오면, 던킨도너츠를 아메리카노와 함께 사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한식을 다함께 먹고 나를 배웅하는 것도 퍽 즐긴다. 그렇게 떠밀리듯 미국에 와 놓고 보니, 집에 있을 때.. 더보기
#12.5555555555 안암과 초하와 전견 당나귀 이 (비행기에서 쓰는 미친) 글을 편집장 쟐롶과 고통 받을 그의 큰창자와 똥꼬에게 선사합니다. 유한소수의 번호조차도 아까워 무한소수의 번호를 매겨 둔 뻘글입니다. 원고번호 1 작희 안암과 초하와 전견 당나귀 나는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이 글을 대체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를 도무지 몰랐을 것이다. 수위를 높여 쓰기를 거듭 권하던 쟐롶의 말을 듣기도 쉽지 않은 것이, 나는 팡팡팡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글은 전혀 쓰지를 못한다. 그건 아마 내가 읽은 책들에서 전반적으로 그런 식의 상세한 묘사가 잘 이루어지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군다나 남성 간의 성교를 문학에서 접해 본 일은 정말이지 없는 것 같아서, 상상력을 발휘해 보고자 하여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제 그 글 하나를 보겠다고 영수증 두.. 더보기
#12.25 즈 수이 데졸레, 미안합니다, 나는 저버림을 당했습니다 연말연시 특집, 버터 바른 글을 써 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도 데졸레. 원고번호 1 작희즈 수이 데졸레, 미안합니다, 나는 저버림을 당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난 6년 동안 크리스마스에 남자친구가 없었던 적이 없다. 올해 한 해는 혼자 있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이렇게저렇게 들어온 싫고 좋은 약속들을 다 미루고 앞당겨 저녁을 집에서 먹었다.연애를 하지 않게 된 후로 술은 늘었다. 물론 늘었다고 해 보아야 한 주에 싼 와인 한 병씩이다. 공기 빼는 도구가 없다 보니 일단 사 둔 와인은 일주일쯤 지나면 쉬어 있기 십상이라 작은 유리병에 나누어 담아 두는 요령도 생겼다. 와인이 있으면 혼자 보내는 저녁도 견딜 만 한 것 같았는데, 집에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되어 있고 '혼자'도 아닌 애매한 인원이 거실에 모..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