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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12.5555555555 안암과 초하와 전견 당나귀

(비행기에서 쓰는 미친) 글을 편집장 쟐롶과 고통 받을 그의 큰창자와 똥꼬에게 선사합니다. 유한소수의 번호조차도 아까워 무한소수의 번호를 매겨 둔 뻘글입니다.


원고번호 1
작희

안암과 초하와 전견 당나귀

                 

나는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이 글을 대체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를 도무지 몰랐을 것이다. 수위를 높여 쓰기를 거듭 권하던 쟐롶의 말을 듣기도 쉽지 않은 것이, 나는 팡팡팡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글은 전혀 쓰지를 못한다. 그건 아마 내가 읽은 책들에서 전반적으로 그런 식의 상세한 묘사가 잘 이루어지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군다나 남성 간의 성교를 문학에서 접해 본 일은 정말이지 없는 것 같아서, 상상력을 발휘해 보고자 하여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제 그 글 하나를 보겠다고 영수증 두 장을, 물을 연거푸 마셔 가며 기어코 씹어 삼킨 편집장 쟐롶을 보며 아이디어를 얻고야 말았다. (알레고리적으로 쓰자면) 그것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의 민중과도 같은 야만이었다. 패션 오브 똥꼬!


편집장의 똥꼬는 왜 고난을 당하느냐고? 이것은 종이/ 섬유질 위주의 식단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최대한 여러 장르에서 예를 가져와 보면, 북한 사회의 기아를 모티프로 한 동화 <꽃제비> (주인공의 동생이, 몇 주씩이나 멀건 죽을 거부하고 대신 나무껍질종이의 원료을 벗겨 만든 비비떡만 먹다가 극심한 변비와 장폐색으로 어린 나이에 죽게 되며, 가족들 역시 모두 변비에 걸려 젓가락으로 서로 항문을 파 주어야 했다), 벨기에 작가 아멜리 노통의 <Journal d’Hirondelle (“제비 일기”)> (살인청부업자인 주인공이, 자신이 죽인 한 소녀와 사랑에 빠진 후 몰래 그 소녀의 일기장조직에서 왜인지는 모르지만 기밀문서로 간주하여 그것을 없앤 주인공을 처벌한다을 한 장씩 씹어먹고는 변비로 죽어가는 것이 엔딩이다), 그리고 김규삼의 완결 웹툰 <정글고> (명왕성이 다 외운 영어사전의 페이지를 씹어먹고는 변비에 걸린다) 등이 있다. 한 마디로, 종이를 먹는 자의 최후는 배설불가능성, 즉 극심한 변비이다. 펄프가 금방 눅진하게 녹아나는 갱지나 화장지 같은 것을 먹었다면 모를까, 그 뻣뻣한 영수증을 내 충고도 무시해 가며 잘게 찢지도 않고 그저 씹어 삼킨 쟐롶의 고통이 어떤 것일는지는 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 글의 요지는 별 대단한 것은 아니고, 안암과 초하가 사랑을 하겠다는데 파괴되어 버린 것은 편집장의 똥꼬인 아이러니한 현실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왜 아이러니한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다세포소녀의 상선영감편을 참조해 주기 바란다. 상선영감 역을 맡은 배우는 시사회에서 커밍아웃을 하게 되는데, 그가 게이라서 불편한 점 단 하나로 꼽은 것이 팬티에 똥이 묻는다,’ 였으니까.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죄의 삯이 사망이듯, 편집장이 보고자 했던 비엘적 월드에서 사랑의 삯은 똥꼬의 고난이다. 그러니까, 안암X초하라고 했을 때에 똥꼬가 불편해질 사람은 정작 따로 있을 텐데도, 편집장은 그들의 사랑을 위해 대신 똥꼬 고난을 당한 것이다. 똥꼬 대속! 똥꼬 구원! 그러니까 잠재적으로, 안암과 초하의 아름다운 결합이 실제로 이루어질 경우 그 똥꼬의 고난은 고난이 아니다. 왜냐면 그 모든 고난은 편집장 쟐롶이 대신 겪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당나귀가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탔던 동물이 어린 나귀였기 때문이다. 나타샤는 구원의 여인이고, 구원의 처소인 출출이 우는산골 속 마가리로 가기 위한 이동 수단은 그러므로 흰 당나귀가 적합할 것이다. 보통 구원의 기사는 흰 말을 타고 오지 않던가. 그래서 수많은 백마 탄 왕자 식의 모티프가 존재한다. 하지만 화자가 바라는 구원이 너무나도 소박하기에, 소박한 입성을 원하던 소박한 메시아가 탄 바로 그 나귀, 그러나 흰색의 나귀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경의 나귀는 아직 사람이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라는 점이다. 배경이 구약시대였고 동물이 나귀가 아니라 양이었다면 제사로 드려지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순수한 동물이다. 고로 메시아가 탄 그 나귀가 바로 메시아 그 자신이 지니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안암과 초하 모두 구원적 연애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적 연애의 끝은쟐롶이 바라는 대로라면여인들에게서가 아닌, 서로에게서 찾아올 것이다. 고로 그들이 출출이 우는 산골미군 기지?—로 함께 흰 당나귀를 타고 갈 날이 아마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 흰 당나귀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고, 나는 그 숭고한 흰 당나귀가 쟐롶임을 조심스럽게 주장해 본다. 메시아가 인류의 죄를 지고 잠시 스올로 내려갔다가 부활했듯, 그 당나귀도물론 숭고한 동물로 거듭된 것임은 분명하나—‘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다는 모종의 처녀성을 상실했다. 이번의 똥꼬 고난 사건을 통해 쟐롶은 처녀성을 상실한 것이다.


(이 주장에 필자의 상상력이 과도하게 개입되었다고 생각할 독자를 위해, 어제 선릉 카페베네에서 분당선 타는 곳까지의 짧은 구간 동안 이루어졌던 편집장과의 대화를 여기서 공개하고자 한다.


**

필자: 그거 변비 아주 심해지면 병원 가야 할 수도 있다.

쟐롶: 그럼 병원 가면 의사가 손가락으로 파 줄 텐데. (만족스러운 웃음)

필자: 축 개통?

쟐롶: 그럼 흑마법사가 되는 거죠. (만족스러운 웃음)

필자: 강제 개통이면 그냥 마법사도 아니고 흑마법사가 되는 거야?

 쟐롶: (만족스러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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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고 있는 흰 당나귀가 떠오르지 않는가. 사실 당나귀의 입장에서는 등만 무거울 뿐 좋아해야 할 이유는 그 무엇도 없다. 하지만 단지 화자와 나타샤의 사랑을 위해 응앙응앙 울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사랑을 하는 것은 안암과 초하인데 처녀성을 잃은 것은 쟐롶이라니.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쟐롶 역시 이 스올에서 살아나, 위대한 흑마법사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자기들의 사랑을 위해 대신 고통을 받은 쟐롶의 똥꼬를 위해서라도 안암과 초하는 바지런히 글을 쓰기 바란다.

덧붙임. 안암과 초하의 로맨스를 요구했다가 전견의 똥꼬에 관한 글이 나오게 된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