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 <배설>/작희

#10 만일 이 모든 것이 실패한다 해도, 내게는 공립도서관이 있다

원고번호 1
작희

만일 이 모든 것이 실패한다 해도, 내게는 공립도서관이 있다


몇 달 뒤면 속절없이 대졸자가 되어 버린다. 다른 학생들처럼 휴학을 할 여유도 내게는 아마 없다. 집에서는 그냥 빨리 내가 졸업하기를 바라는 눈치다. 그래도 내가 이곳에 옴으로 해서, 가계의 씀씀이가 조금은 줄었을 테니, 내가 졸업을 일단 하고 나면 가족들은 조금이라도 저축을 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모든 것이 실패하는 상상은 수도 없이 했다. 실비아 플래스처럼,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안 해 본 것이 아니다. 다만 그녀는, 쓸쓸한 포스트모던의 시대 중년 여성으로서 오븐이라는 사지를 택한 것이기에, 그 방식은 이십대 초반, 곧 초중반의 나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전에 모 커뮤니티에 자살하는 일곱 가지 방법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대표적인 것 하나만 고른다면, 전철 앞에 뛰어드는 것은 전철을 운전하시는 분에게 불필요한 피해를 주기 때문에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는데, 모 친구는 그런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내가 죽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유년기를 꼭 붙들고 있는 팔을, 그 팔이 붙어 있는 몸을 누군가가 잡아당겨, 그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마침내는 분리되고 마는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지나간 것은 지나간다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건 아마 기억력이 필요 이상으로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일 년 반, 삼 년 전까지도 최근이라고 부를 수 있었고, 그건 열여섯 살쯤의 청소년에게는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에게는 최근인 시간이 타인에게는 옛날이라는 사실이 기이했고, 그래서 내 속으로 깊이 잠겨들어가 최근을 최근으로 남겨두고자 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죽고 싶다, 를 주문처럼 외치던 친구들 몇몇과 어울렸다. 한 놈은 페이스북 등으로 채팅을 걸어, 아 죽고 싶다, 고 말했고, 다른 놈은 사자 갈기 같은--늘 복장 검사 이후에 등교하거나 아예 등교를 하지 않아 규정 밖으로 벗어날대로 벗어난--머리를 흔들며 다가와 아 죽고 싶다, 는 말을 아 배고프다, 처럼 털어냈다.

요즘 사후세계에 대한 작품을 참 많이 읽는다. 전에도 언급한 연극에서는, 사후세계를 거대한 빨래방으로 묘사했다. 죽을 때에 입고 들어간 옷 한 벌밖에 고인들은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다같이 모여, 다같이 발가벗고 옷을 세탁한다고. 그 장면에서 나는 갠지스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화장한 재를 그 강물에 떠내려보내기 때문에, 그 물에 빨래를 하면 뼛가루 물에 빨래를 하게 되는 셈이다. 세탁을 할 때마다 옷을 모두 벗어야 한다면 그 역시도 모종의 윤회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아무튼 그런 빨래방이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가 존재하고, 누가 어느 빨래방으로 가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옛날에 종교에 대해 생각할 때에, 사실 서로 다른 종교의 천국들은 서로서로 다른 우주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나는 다층적 우주라는 개념을 참 좋아한다. 천계영의 DVD를--가장 인기 없는 작품이라던--가장 좋아한 것도 바로 그 이유다. 저장하지 않고 날려 버린 원고와 잃어버린 양말 한 짝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어딘가에 있다면, 서로 다른 천국 정도야 충분히 존재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나보코프의 소설 페일 파이어에도 그런 다층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요지의 발표를 준비했다. 소설에서 넌지시 암시하는, 물에 빠져 죽은 소녀--스프라이트, 인어가 모두 해당되는--들만 모여 사는 호수 밑 세상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때에 천계영의 양말 세상이 아른거렸다. 자살이란, 선형(線形)의, 진보적 시간관념에 대한 반항행위라고 누군가 발표했었다. 영미권에선 성소수자를 가리키는 퀴어, 라는 말은 사실 그런 반항행위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진보적 시간관념이라는 것은 또한 번식행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번식을 통해 세대를 이어나가는 것이 전통적 시간관념이라면, 그것을 거부하는 모든 행위는 퀴어 타임을 반영하는 것이고, 자살 역시 헤겔의 유물론적 시간과는 달리, 앞도 위도 아닌 '옆'의 전혀 다른 우주로의 탈출이기 때문에 퀴어 타임을 제창하는 행위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발표가 좋았다.

10분의 개인 발표 시간 후에는 5분의 질문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내 질문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나는 퀴어타임이라는 것이 사실 원시적 시간과 같다고 생각한다는 질문을 하려고 했었다. 시계가 생겨나기 전에도 사람들은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는 어떤 힘이라고 생각했을까. 왕이 죽으면 새 달력을 만들어 햇수를 새로 세기도 했고, 농력이라는 것은 사실 순환에 의거한 것이지 진보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아무튼, 그 '죽고 싶다' 친구 두 명으로 돌아오면, 전자의 친구는 정말로 죽고 싶어하는 것 같았고, 나는 그를 말리기 위해 나의 자살 방지 기제를 설명해주었다.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다면 정말 정말로 탈출하고 싶을 때 탈출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두고 보아도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이 그 기제라는 것이었고, 요즈음의 나는 아마도 그 '언제든지'에 봉착해 있는 것 같다.

다 놓고 어디론가 표류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진로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 퀴어타임이 필요하다.

어제 졸업논문에 필요한 예술도서를 잔뜩 대출해 짊어지고 오면서 나는 좋은 도서관이 있는 곳에 살지 않으면 불행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비이성적인 과거보존본능에 비추어 봐도, 내가 부모님 집을 떠난다는 생각이 두려워졌을 때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이 다음에 거실의 책들은 내가 상속받겠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집에는 천 권이 넘는 책이 있지만 그것들은 이제 아마도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곳에서 사들인 책도 아마 몇 달 뒤면 팔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모든 것이 실패해도 공립도서관이면 족하다는 요지로 글을 쓰고자 했다. 영화 굿 윌 헌팅, 을 보면, 주인공이 하버드 학생에게, 도서관에서 얼마든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몇만 불씩 내 가며 배우느냐고 야유하는 장면이 있다. 윌의 여자친구 스카일라는 스탠포드 로스쿨에 왔고, 윌 역시 여자친구를 따라갔으니 아마 스탠포드 어딘가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가 아마 팔로알토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말들을 쓰면서 이런 같잖은 대입은 왜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람도 동물과 같아서 이상적인 서식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라가 될 수도 있고, 도시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직장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어느 장소에 가든 생활방식이 크게 변하지 않고, 도시와 금방 사랑에 빠지는 편이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는 서식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요즘 느끼는 것은 내 서식지라는 게 이 생활방식 자체라는 사실이다. 좋은 도서관이 있고, 글을 쓸 수 있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유년기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는 내 서식지이고, 그것이 없어진다 했을 때에 내가 멸종하지 않을 거란 자신이 없다. 노마디즘을 실천한다고 농담 반으로 자부해 왔는데, 이런 생활방식에 대한 집착도 어쩌면 노마디즘의 실패가 아닐까? 하지만 노마디즘 역시도 라이프스타일이 아닌가. 노마디즘으로부터의 노마디즘도 노마디즘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면, 한국의 공립도서관으로 행복할 자신이 없다.

한국에서 생산된 책 자체는 요즘은 흥미로운 것이 별로 없다. 번역서마저도 마케팅이니 양장이니 넓은 행간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물을 탄 술을 마시는 것 같아서, 양심을 셀아웃하는 것 같아서 행복할 자신이 없다. 한국의 공립도서관으로 행복하고자 했다면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당장 잘 곳이 없는데도 영자신문만 고집해읽으셨다던 맥도날드 노숙자 할머니가 나는 내심 이해가 갔다. 마지막 자존심과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서식지의 문제다.

에덴동산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은 이미 (죄 때문에) 자기 자신의 이상적 서식지에서 벗어난 곳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적 서식지가 가장 온전히 구현된 것이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이고, 말하자면 나는, 저곳에 내가 먹어도 되는 풀이 있을까, 하는 질문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인간 송가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은 옛날부터, 스스로를 적응력이 강한 존재, 무엇을 주어도 잘 소화시키는 존재로 묘사해 왔다. 물론 이 대륙의 인간을 저 대륙에 옮겨 두면 먹을 수 있는 과일과 풀을 찾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시시대와 다른 식단 때문에 생겨나는 수많은 성인병을 보면 인간도 그렇게 적응력 강한 족속은 못 될지도 모른다. 적응력이 강하다고 해서, 모든 조건이 이상적인 서식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이상적 서식지에 살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렇게 보았을 때 사실 나는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기에. 만일 이 모든 것이 실패한다면, 사실 길은 많다. 다만 그 길들이 내 서식지가 아닐 뿐이다. 모든 야생동물은 아마 원시의 자연을 꿈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다른 얘기지만, 펫숍 오브 호러스라는 만화를 보면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살을 입힌 것이 모든 생명체가 꾸는 원시의 '꿈'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지고, 아직은 총을 갖지 못한 인간도 맨손으로 야생동물과 겨루어야 하는 곳.) 가령 팬더는 끝없이 펼쳐진 태고의 대숲을 꿈꿀 것이고, 얼룩말은 세렝게티를 꿈꿀 것이다. 자기 서식지가 아닌 곳에 옮겨진 인간도 그렇게 원시림의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저씨들의 '왕년에' 토크도 그런 꿈의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실패하면, 그러니까, 나는 아마도 책의 숲을 꿈꾸며 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적성에 맞는 진로 선택의 중요성과 그 험난함을 이 긴 글로 표현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