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번호 2
작희
하나 반의 고향 1
일전에 배설 필진의 모 멤버가, 너의 글에서 망명작가의 냄새가 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슨 의중으로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의 아이러니가 섞인 발화임은 분명했던 것이, 나는 망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도피자가 아닐지언정, 나는 망명 작가들의 글을 좋아한다. 영어로 피신해 오는 이국의 언어 화자들이 좋다. 그렇게 한 다리를 건넌 영어로 쓰인 글은 늘 어디론가 도망하고 있는 것만 같고, 단어와 문장으로 쌓아올린 벽을 벽돌 하나 단위로 다른 곳으로 옮겨 보면 그 모든 것은 사실 거대한 심연을 가리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는, 그런 허망한 속임수의 느낌을 준다. 같은 이유로 나는 미대 입시생들이 곧잘 그리는 공간 구성 작품을 좋아한다. 흑연 가루가 도화지의 요철을 다양한 명암으로 메워 내기 전까지 그것은 하얀 평면에 지나지 않았기에.
나보코프는 프랑스어로 집필한 단편소설 마드무아젤 O에서, 기억이 더 바래어 가기 전에 (그리고 아마도 자신이 죽어서, 그 집요한 기억력으로 망막에 맺어 둔 이미지마저도 관 속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스위스 출신 가정교사 마드무아젤 O를 글로 옮겨 보아야겠노라 선언한다. 그 역시도, 기억을 글로 옮기는 일은 지도를 만드는 일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 하다. 글 속에 어린 시절의 자신을 구성하고, 기억 속에 남겨둔 어린 날의 크레용을 빼어내 그 손에 들려주면, 글 속의 자아는 크레용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지만 정작 현재의 기억 속 크레용 통은 날로 비어간다고 말했으니까.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도 제도법(cartography)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어느 작은 왕국에서는 제도법이 첨단으로 발달했고, 지도를 너무도 정교하게 만들고자 한 나머지, 지도 위에 왕국 안의 모든 산과 강과 들판을 실물처럼 정교하게 옮겨 놓고 나자 정작 실제의 왕국은 사라져 버렸노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망명 작가들의 고향의 풍경을 글로 재현하는 일에 그토록 힘을 쏟는 것은, 아마 자신들이, 과거의 고향의 모습을 간직한 마지막 망막이라고 생각해서일 터이다. 영국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세운 미국의 영어가, 15, 6세기쯤 쓰이던 영국 영어의 특징을 더 잘 보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모든 망명에는 이유가 있고, 일단 등지고 떠나온 고향은 이미 다른 곳, 끊임없이 변해 가는 곳이다. 그에 반해 기억의 망막에 보존된 고향은 변하지 않고, 나중에 그렇게 변해 버린 현실의 고향에서 누군가가 과거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면 그들이 방문할 박물관은 아마 망명 작가들의 글 속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망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억과 시간이 빚는 요망한 부조화는 모든 이민자를 어느 정도 망명자로 만든다.
어제 기숙사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며, 방이 있는 곳이 고향인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고향이 지니는 의미는 모든 개인에게 다를 것이다. 조금 더 상투적으로는, 어머니가 해 주시는, 김이 보얗게 오르는 따뜻한 밥이 있는 곳이라든지, 태백에서 자란 나의 친가 쪽 식구들의 경우는, 여름밤에도 모포를 덮고 굴 속 새끼여우들처럼 웅크려 자야 하는, 축축한 한기가 서린 곳이라든지.
나는 여섯 살 때부터 나 혼자 방을 썼다. 그 때 산 체리목 책상과 의자를 대학에 오기 전까지 썼으니, 부모님은 어린 딸에게 엄청나게 커다란 가구들을 사 주신 셈이다. 당시 우리 집 살림에는 제대로 된 접시 한 세트가 없었고, 그래서 나와 엄마와 동생은 늘 불은 라면을 냄비에서 바로 건져 먹었다. 그릇이 모자라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고, 엄마가, "라면은 원래 이렇게 먹는 거야," 하고 말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셋째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부재중이다. 그는 가끔 집에 들어와 나를 킴스클럽이나 세이브존 같은 곳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내가 인형을 고르면 아버지는 "그거?" 한 마디와 함께 내가 고른 것을 선선히 사 주었다. 세 살 터울의 동생은 마트에 갈 때마다 불빛이 나오는, 흰 플라스틱으로 된 총이라든지, (지금 생각해 보면) 소나타를 닮은 미니카 같은 장난감을 두세 개씩 집어들었고, 나는 그것이 미안해 가끔씩만 사고 싶은 인형을 집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가끔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류의 질문에 아빠가 좋다고 대답해 본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사실 아빠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기억력이 대단히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 어떤 장소나 사람을 떠올리면 그 냄새까지도 세세히 떠올릴 수 있었다. 재작년에 응급실에 다녀온 후 한동안 후각이 마비되었었는데, 그 후로 그런 후각적 기억력은 없어진 것 같다. 당시에는 아빠를 생각하면 담배 냄새와 이따금 쓰던 푸른 색 감도는 선글라스와 나에게 늘 멀미를 나게 하던, 그가 몰던 소나타 안의 자동차 모양으로 생긴 방향제가 기억났다. 식구들이 하나같이, 내가 태어났을 때에는 그가 나를 참 마음에 들어 했다고 말해 주어 나는 내심 그것이 자랑스러웠고 그래서 그저 그런 줄로 생각하며 그의 부재마저도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서 "참 마음에 들었다"는 그 말을 다시 되새겼을 때는 어딘가 아릿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지, 당신 딸이 맘에 안 들면 그럼 어떻게 할 건가요?)
일곱 살 때 한 번은 집에 와 있던 그가 나에게 돈을 주며 디스 한 갑만 사 오라고 했었고, 나는 심부름을 자랑스레 잘 했기 때문에 돈을 받아들고 곧장 슈퍼로 향했다. 아저씨는 아이들에게는 담배를 팔지 않는다며 나를 돌려보냈고, 나는 디스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와서 현관에서, 방에 있던 아빠에게, 애들한텐 안 파는 거래, 하고 일러 주었던 것이 생각난다. 아빠는 조금 화를 냈던 것 같다. 일주일쯤 지나서, 엄마에게 아무 생각 없이 그 이야기를 했을 때에 엄마는 다른 이유로 화를 냈지만 그 화를 받아야 할 엄마의 남편은 사흘쯤 귀가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엄마는 화 내는 일을 잊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무렵부터 이미 편두통을 앓았다. 책을 읽다가 눈을 감으면 머리가 핑 돌며 무지갯빛 환이 보였다. 편식은 빈혈의 원인이 되었고, 빈혈과 맞물린 편두통이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머리를 조여와, 한때는 머리가 한 쪽만 이렇게 아픈 것은 두개골 속에서 뇌라는 것이 한 쪽으로 쏠렸기 때문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뇌가 다시 쏟아져 내려오도록 다른 쪽으로 머리를 벽에 쾅쾅 부딪혔던 것도 기억한다. 머리가 아프다고 엄마에게 이야기해 본 적은 없다. 내가 바닥에 연거푸 박치기를 하는 것을 본 엄마는 그저 미련하다고 혀를 끌끌 찼을 뿐이다.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눈을 감고 두통을 견디고 피아노 연습을 하고 숙제를 하는 법을 익혔다.
드라마를 많이 보아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엄마가 이따금 멍이 들어 있다든지, 아빠에게 조금 미심쩍은 여자친구가 있다든지 하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랐다. 어른들은 가끔, 싸움을 할 때에는 아이들을 가구마냥 눈과 귀가 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자면, 어른들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이목을 가구 이상으로 보호해 줄 정신이 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어느 집이나 그런 문제가 다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유치원에서도 학교에서도 그것을 아무도 묻거나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집이나 하루 종일 약 냄새가 나는 분홍색 이불에 묻혀 잠을 자는 고모가 하나쯤은 있는 것이라 여겼다. (그 고모는 드물게 잠에서 깨어나면 부은 얼굴로 계란을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맛있게 부쳐 주었다.) 나중에 다양한 교육심리학 방법 같은 것들을 보며 나는 사실 조금 유별난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알았만, 만약에 아이가 자신이 그렇게 유별난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래도 그 환경이 유별난 환경이 되는 것일까, 지금도 가끔 고민을 해 본다. 어쩌면 내가 어디에 가든 조금 지엽적이고 주변적인 인간이 되게 된 것이나, 사춘기 때 손목에 많은 상처를 만든 것이나, 그런 것들이 다 그런 유별난 환경 때문에 일어난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유별난 것인지도 사실 잘 알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내 공간은 늘 방 하나였다. 나는 방에 스티커 붙이는 것을 좋아했고, 책상과 벽에 다닥다닥 붙은 스티커를 보며 엄마는 징그럽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열 살이 되던 해 설날에는 내가 직접 껌 떼어내는 칼 같은 것으로 스티커 수백 장을 하나하나 떼어냈지만, 지금도 어느 곳을 가든 새 방으로 이사를 하면 방에 그림 같은 것을 붙이고 내가 업보처럼 짊어지고 다니는 책들을 꺼내 책꽂이에 꽂는 일로 영역 표시를 하는 습관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내게는 아마도 집이 없다.
서울의 가족들 집에는 이미 내 공간이 없고, 집에 돌아가면 나는 책상과 책꽂이가 없다는 사실에 늘 위축되어 있다. 낮에 집에 머물러 있으면 집안일을 하시는 할머니에게, 빗자루에 걸리적거리는 의자처럼 죄송한 마음이 들어 억지로 일을 구해서라도 밖으로 나돈다. 내 공간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엄마는, 네가 온 후 신발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 번 보라며 코웃음을 칠 게다. 하지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과 내 공간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어느 집에 손님으로 가든, 주인은 나에게 여기다 여행가방을 두라며 공간을 마련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위해 마련해주는 공간과 다를 바가 없어서, 여행가방이 오히려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것뿐이다. 내 소지품이 놓인 공간이 내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내 머릿속 집과 실제의 집 사이에는 간격이 있고, 나는 그 간격 어딘가에 어중간하게 떠 있을 뿐이다.
물론 나는 망명자가 아니고, 집에 자유로이 돌아갈 수 있다.
단지 내 고향이 서울이고, 고향으로 삼기에 서울은 참으로 애매한 도시일 뿐이다.
미국으로 놀러 온 사촌동생에게 밥을 사 주는 것과, 통통한, 그러나 아는 것이 적어 먹고 싶은 것도 많지 않은 어린 여동생에게 서울에서 여름의 막바지에 빙수나 버블티 따위를 사 주는 일이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베네통 온라인샵을 둘러보다가 빨간 아동용 모직 카디건을 하나 발견했고, 올 여름 먹은 것이 첫 팥빙수라는 아기 동생(열 살이나 되었지만 막내이기에 영구히 아기인)이 머릿속에 밟혀 용돈을 털어 그것을 주문했다. 박완서의 단편소설 중, 미국으로 시집 간 여성이 늘 미제 물건을 바리바리 한국으로 부치다가, 90년대쯤의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여전히 부치고 있는 그 잡동사니를 이제는 한국의 친척 중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귀국하기 전 가족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털어 물건을 살 때면 늘 그 박완서의 단편소설 생각을 한다. 사실 부모님이 한국에서 구입하시려면 구입하실 수 있는 가격의 물건들이지만, 집에서는 선물로는 받을 수 있을망정 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사 가는 것이다. 엄마는 절대 비싼 아이크림을 사 쓰지 않을 것이고, 동생을 위해 빨간 베네통 카디건을 사지도 않을 것이기에. 내가 버는 용돈이 얄팍한 것이 가끔은 그래서 슬프다.
막내동생은 맛있는 것을 먹으면 얼굴 가득 행복한 표정을 뿜어낸다. 막내동생과 비슷하게 생긴 통통한 엄마 역시 아이스크림 큰 통을 보면 행복해하기에 여름의 나는 늘 아이스크림을 적으면 오천 원, 많으면 만 원어치씩 사 갔다.
집에 돌아가서 하는 일이 돈을 벌어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퇴근하는 일이라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가끔 여동생을 데리고 나가 맛있는 것을 사 먹이는 일도 좋다. 다만 출발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어딘가에서 한동안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지금은 동생에게 빙수를 사 줄 때에도, 부재의 시간을 마론 인형으로 바꾸어 주고 다시 집을 떠나던 아버지가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고, 그 아버지가 지금은 돋보기를 끼고 일 년에 한 번 동맥으로 내시경을 넣어 검사를 받아야 하는 환자라는 사실에 빙수를 먹는 동생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본다. 엄마가, 우리 집이 가난한 것 같으냐고 묻자 막내동생은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게 나 때문인 걸 동생이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누가 얼음을 한 덩이 속에 들이민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마 막내동생도 빙수를 맛있게 먹으며 내 무표정을 기억의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세상에 문제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렇게 각인해 두었던 언니의 무표정을 꺼내 그 부조리함의 퍼즐 한 켠에 맞추어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이 그린 가족사진 중의 언니는 부재중이 아니지만, 그 그림을 보며 일곱 식구 중 언니를 그려넣을 생각을 처음부터 한 것인지, 아니면 아, 하고 덧붙이듯 그려 넣은 것일지를 생각해보다가 그 생각은 지워버린 것도 기억이 난다.
내가 미국에 온 직후, 가족은 방 4개짜리 집에서 3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딱히 더 나쁜 쪽의 변화는 아니다. 전셋집에서 자기 집으로 이사한 것이기에. 다만 방 배정의 면에서 보았을 때, 줄어든 방 한 개는 물론 내 것이다.
그 방은 크고 조용하고 추웠다. 아파트 외벽 쪽에 자리한 데다가 북향이라 한여름에도 제법 두꺼운 이불이 필요했고, 한기 때문에 모기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영어가 익숙해짐에 따라 방에 종이와 책들이 쌓여갔고, 그래서 방에서는 늘 종이 먼지 냄새가 났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내가 미국으로 옮겨온 날 밤에 퇴근한 아빠가, 그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빠가 딸을 그리워한다는 요지로 말씀하신 것 같지만, 아마 이제 이 아이의 등록금을 4년 동안 어떻게 대어야 할 것인지, 그런 것도 아빠는 아마 고민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형제자매가 셋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가족 중 자신의 역할을 분별하는 것이 조금씩 힘들어지는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요 근래 동생 셋의 양육 방법을 고민하게 되면서야 부모님은 조금씩 내가 별종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계신 것 같다. 적당히 좋은 국내의 4년제 대학에 진학했더라면 나는 아마 전형적인 맏딸이 되었을 테지만, 유학을 결심하면서 전형적인 장녀와 장남을 합친 것 같은 기이한--착하고 공부를 잘 하고 식구들을 걱정하며 돈을 벌지만 또한 가장 많은 교육적 투자를 요구하는--캐릭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아빠는 막내 여동생을 가장 귀여워하고, 곧 스무 살이 되는 가장 손위의 남동생과 가장 많은 교감을 한다. 그 중간에 낀 초등학교 고학년 남동생에 대해선, 그냥 이상한 놈, 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아빠에게서 애정 표현을 받아본 일이 별로 없다. 나는 아빠만큼 머리가 좋지 못했고, 그래서 늘 전교에서 3-4등 정도에 머물렀다. 수학과 체육을 빼면 월등히 매 학기 1등을 했을
테지만, 사실 그런 과목 하나쯤 없는 우등생이 어디 있을까. 저렇게 공부해선 못 쓴다며 아빠는 나를 늘 못 미더워했고, 술을
먹고 들어오신 날이면 그런 아쉬움을 서툴게 표현하셨다. 그래서 아빠가 내 방에 들어가 가만 앉아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은 생각을 했다.
내 방이 없어졌다는 것은 묘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아빠가 들어가 앉아 있을 방이 이제는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들어가 공부할 방도 이제 없다는 말이기에 나는 늘 밖으로 돌 방법을 찾는다. 망명을 오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두고 온 공간은 늘 변하며 그 사람이 있었던 자리를 채워 놓는 법이다. 아마 가족을 새로 찾기 전까지 나는 늘 짐을 풀 공간을 찾아 양해를 구하고 어디에선가 손님으로 지내기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마드무아젤 O의 주인공 가정교사 마드무아젤 O는,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은 자신이 떠나온 알프스 산맥의 사진을 방에 붙여 두고, 스위스로 돌아가서는 러시아의 사진을 방에 붙인 채로, 러시아에서 돌아온 가정교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거주민으로 지낸다. 샌프란시스코와 베이 지역을 오가는 칼트레인을, 클리퍼 교통카드로 탑승하는 일이나, 서울 지하철을 티머니로 타고 다니는 일이 아무리 익숙해진다고 해도, 방이 한 번 없어진 이상 그 사람은 두고 온 곳의 사진으로 자기 자신을 정의하게 되기 마련이다. 내 옷장에 서울의 지하상가와 팔로알토의 몰에서 사들인 옷가지와 신발이 섞여 있는 한은 나는 어디에 가 있든지 이방인으로 보일 것이다.
방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라벨이 붙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내 방이기 때문인 것 같다.
에덴 동산의 아담이 가장 축복받은 인간이었던 이유는, 그만큼은 타인의 라벨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한 채 (신-인간의 양분에 의한 라벨을 제외하면) 주변의 것들에 라벨을 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방의 물건들은 내가 분류하고 정리하고 마음대로 부를 수가 있다. 물건들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기에 나는 내 방에서만큼은 재키도 채린도 스베타도 아니다. 내 방에는 내가 하나뿐이기에, 외도가 일상인 1인칭 대명사도 다른 애인과 흘레를 붙지 않는다. 나는 나다.
이방인이 피로한 것은, 그 생활은 늘 더 많은 추가의 라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름을 쓰더라도 다른 발음으로 불리기에 이름 역시 배로 무거워진다. 추가로 필요한 서류만큼이나 귀찮은 것이 라벨이고 라벨에 부록으로 달려 오는 설명과 해명이다.
이 방에서도 7개월쯤 더 머무른 후에는 내 흔적을 다 지우고 비워 내야 한다.
그래서 고향은 아마도 내 여행가방 안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옷가지를 싸 놓은 상자 서너 개를 고향이라 부르기에는 무언가 씁쓸한 심정이 없지 않다.
옛날 망명자들이 얼마나 짐을 싸서 고향을 등졌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브로드스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고향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안에 남은 과거의 분량이라는 말 같다. 짐조차 많이 지니지 못한 채로 바다를 건넜을 테니 아마 고향에서 남은 것은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뿐이었을 것이다.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할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아마 고향이 없어지는 건, 두고 온 그 물리적인 장소가 단시간에 많이 변화할 때의 이야기인 것 같다. 나는 집에 갈 때마다 동생들이 자라 있는 걸 보며 기억과 실제의 간극을 본다. 조금 있으면 가장 어린 두 동생들이 조금씩 어린아이 태를 벗기 시작할 테니, 아마 시간이 고향을 먹어 들어가는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다.)
청소년기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많고,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것 말고도 기억을 보존할 방법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말이 별로 없던 아이였기 때문에 내 유년기의 이야기는 나 외에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세세한 것을 기억하는 것은 대개 아이들의 전유물이기에 (가령, 고모가 그 자수 놓인 꽃분홍빛 인조견 이불을 기억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유년기로부터 더 멀어지기 전에 글로 이야기를 많이 옮겨 두어야 할 것 같다. 이미 기억에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낱낱이 넣어볼 수 있게 된 시점에서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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