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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11 세상은 어찌 보면 아름다운 곳일지 모르나

편집장 쟐롭을 사악하다 사악하다 부르지만 역시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잘못입니다. 마침 오늘은 크리스피크림 도넛을 세 개 먹었으니 이대로 자다가는, 이틀 뒤 귀국을 했을 때 빼빼로 같은 서울 여자들을 본 후 저의 스트레스가 너무 클 듯 하니, 밀린 원고라도 완성하고 자겠다는 심산으로 글을 씁니다.


원고번호 1
작희, 잭희, 자키베틀라나, 키베틀라나, 키배뜰... 아닙니다.


세상은 어찌 보면 아름다운 곳일지 모르나


본 웹진의 편집장 쟐롭은, 배설은 희망을 찾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힐링 블로그가 아니라고 말했다. 먼젓번 원고도 사실은 '멸종'에 대한 이야기이니, 그다지 희망적인 이야기는 못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민족의 정서는 '웃음으로 눈물 닦기,' 즉 웃으면서 체념하기가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나는 진로 고민이 많아질 때마다 글을 썼고, 그렇게 쓴 글은 지금은 다시 돌아보지 않으니,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도 아마 소위 '흑역사'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배설이 힐링 블로그인 이유는, 글을 쓰는 이들에게 배설의 공간을 마련해줌으로써, 배설을 통한 힐링의 현자타임을 제공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각설하고, 본고의 제목은 사실 흔해빠진 구조로 되어 있다. 지하철역 승강장, 계단 바로 옆의 벽에 붙어 있는, 역 인근의 절이나 교회에서 제공하는 힐링용 이야기들에 어울릴 법한 제목인 것이다. 차이점은, 그러한 이야기들의 요지가 대부분 세상은 알고 보면 아름답고 희망찬 곳이라는 내용이라면, 이 글의 요지는, 세상이 아름답고 희망찬 곳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차원에 있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대학에 와 1학년 때에, 3학기 중 두 학기 연속으로 (2학기에 걸친 수업이다) 들은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나는 총 네 번의 에세이를 제출했다. 주제는 물론 각양각색--고골의 '외투'와 성인들의 삶을 적은 문학 장르인 비테, 거장과 마르가리타, 공산당 선언 등--이었지만, 내가 그 모든 에세이에서 전달했던 핵심 메시지는 사실 한 가지였다. 세상은 말이 안 되는 곳이고 사람의 물리적 시각(sight)으로는 그 구조를 다 감지해낼 수 없지만, 모종의 영적/신적인 직관(vision)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그곳에는 사실 어떠한 구조와 조화가 있다는 것이 그 메시지였고, 노문학과 러시아의 정서 자체가 사실 종교적 색채에서 발전한 것이기에 노문과의 포닥 스태프와 교수님들은 모두 내 에세이를 좋아해 주었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카라마조프 형제들, 에서, 악마의 역할은 세상에 부조화를 창조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부조리가 있기에 사람들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신앙과 불신 중 하나를 택일할 수 있고,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이른바 키에르케고르식의 도약을 하지 않으면 자유의지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라고. (쉽게 말하면, A=A를 믿으라고 하여 믿는다고 그것을 어찌 자유의지라고 볼 수 있겠느냐는 거다. A=B를 믿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짜 양심의 자유라는, 조지 오웰식의 정의를 적용한 논지이다.) 이러한 구조라면, 부조리와 악 역시, 더 큰 신의 계획 내에서 조화로운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그 조화를 감지해 내기 위해서는 시각이 아닌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동안 그런 에세이를 잘 쓰지 않다가, 2주쯤 전 페일 파이어에 대한 자율주제의 에세이를 준비하며 다시금 그 부조화와 조화의 세계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나보코프와 에셔를 비교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주제였고, 내가 발견한 그 둘의 접점은 프랙탈이었다. 가장 사전적 정의로 말하자면 프랙탈이란, 내부 구조가 끊임없이 전체 구조를 반복하게 되는 형상을 말한다.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프랙탈 구조의 예로는 눈송이 결정체와 해안선의 모양 등이 있다.



프랙탈이란 본질적으로, 혼돈(chaos)내의 질서, 유한한 공간 내의 무한함, 곡선과 직전의 교차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내가 읽은 대중서적 중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설명이 잘 된 것은 아마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였던 것 같다. 관심이 있으면 찾아 읽으시길. 조금 더 고급 서적을 원한다면 홉스타더의 괴델 에셔 바흐, 를 추천한다.) 위의 에셔 작품을 보면, 직선으로 이루어진 금붕어 모양들이 모여 원을 만들어 낸다. (미적분과 동일한--비슷한? 나는 이과가 아니라 비슷한지 동일한지 모르지만 대충 동일한 것 같다--개념으로 보시면 된다.) 원의 넓이는 유한하지만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작은 물고기 모양들이 존재하고, 원의 바깥쪽으로 갈수록 물고기를 이루는 바깥쪽의 선들이 만들어내는 모양은 불규칙해 보이지만 사실 그 선들은 내부적 규칙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이 프랙탈이라는 것이 대체 왜 중요한가 하면, 혼란스러워 보이는 세상에 일종의 안정감과 규칙성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중고교 과학 과목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알겠지만, 세상은 사실 무수히 많은 입자--원자와 분자--가 만들어내는 그물로 되어 있고, 물리학(피직스)을 형이상학(메타피직스)으로 이끌어간다고 비웃던 내 공대생 친구들의 말을 무시하고 이 유비추리를 조금 더 이끌어간다면 그것은 불교의 '삼라' 그물과도 비슷한 것이며, 우리네 유년기를 함께한 동화 '고양이 학교'의 생태계 그물과도 사실 비슷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세상은 사실 여러 겹의 촘촘한 그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그물이 대충 짜여진 것도 아니고 사실 어떤 정교한 규칙에 따라 짜인 것이라면, 그 구조를 읽을 수 있는 비전을 가진 누군가에게라면 세상은 사실 아주 아름다운 곳인 셈이다. 그 그물과 접점을 이루어낸 알료샤는 땅에 거듭 키스를 하고, 페일 파이어의 세 번째 칸토에서 우연과 혼돈 속 질서--"link-and-bobolink"--를 발견해낸 존 셰이드는, '죽음'으로 대변되는 물리적 존재의 한계성에서 마침내 해방될 수 있다는 희미한 희망(faint hope)을 얻게 된다.

문제는, 그 그물과 접점을 이루고 며칠 지나지 않아 존 셰이드는 세상을 뜨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당장 눈에 보이는 혼돈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그물은 사실 조화롭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셰이드의 죽음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개인의 죽음은 세상의 거대한 프랙탈 그물 속에서는 사실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부조리한 죽음 때문에 세상이라는 그물이 더욱 아름답고 풍요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어진 체스 문제에 대한 아름다운 해답을 알아내려고 할 때, 말 몇 마리가 필연적으로 죽어야 가장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움직임의 패턴을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개개인으로서 우리는 대부분 그물과 접점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쉽게 말하면, 당신이 취직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 전체가 돌아가는 내부적 조화의 면으로는 별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그 그물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조물주가 아닌 당신에게는 역으로 그 조화라는 것이 의미가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볼 권리'라는 책에서 저자 Mirzoeff는, 가시성(可視性, visuality)이라는 것이 사실은 매우 폭압적인 개념임을 주장한다. 한 나라의 지도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은, 지도 기술자와 측량사를 고용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어떤 권력자에게만 주어지며, 따라서 가시성이라는 것은 곧 수직적 권력과 지배의 상징이자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발로 뛰어 그렸다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좀 다른 종류의 가시성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재의 정보가 가시화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본력과 기술력이 소요되며, 그러한 자본력과 기술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원시시대의 고인돌 건축에 버금가는 지배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들쭉날쭉해 보이는 해안선에 내부적 조화와 구조와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인간은 헬리콥터를 타거나 현미경을 이용해 해안선을 미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생의 구조와 조화와 아름다움은 그러나 헬리콥터를 타고서도 볼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세상은 어찌 보면 아름다운 곳일지 모른다. 나는 위에서 설명한 그물과 구조와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 그물과의 접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어찌 보아야' 아름다운 곳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우리 같은 범인은 그 '얻디 보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늘 체스 게임에서 지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 3차원적 z축을 더하지 못한 채 2차원적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세상은 못생긴 곳일수밖에 없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 물 결정의 아름다움을 논한 것을 본 적이 있지만, 현미경 없이 물은 그냥 물일 뿐이고, 그 아름다움을 지각할 능력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못생김에 신물이 나는 날이 있다면, 그 신물 남이 평소의 도를 넘어 당신은 캐삭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까지 되었다면, 에셔의 판화들을 구글링해 찬찬히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 그림을 들여다보듯이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볼 능력이 당신에게 있다고 천천히 상상했을 때, 세상의 못생김이 조금은 덜해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다시 2차원의 해안선 위에 내려섰을 때, 체스 말 같은 우리에게 세상은 못생긴 곳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에셔의 그림 역시 평면 위에 부려 놓은 조화에 불과하기에, 창문에 비친 하늘로 날아드는 이카루스는 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덧붙이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