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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14 막음과 마감

원고번호 1
작희

막음과 마감


(모 후배가 공유한, 사랑과 죽음과 마감은 막을 수 없다는 말을 보고 도서관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생각한 글이다. 그동안 차마 소수점 이상으로 글 번호를 매길 수가 없다가 오랜만에 뭔가를 올린다. 배설은 역시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오게 되는 곳이다. 제목을 제대로 붙이자면 사랑과 죽음과 마감이라는 말을 모두 넣어야 하겠는데, 그랬다가는 당초에 글을 읽지도 않을 사람이 많을 것 같았다.)

마감, 이라는 단어는 그 어감과는 다르게 순우리말이다. 막음, 과 뿌리를 나누는 말(막장과도 물론 관련이 있다)이지만, 굳이 의미를 잘 더듬어 생각해보면 마감 쪽이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사촌일 것이다. 막다는 동사는, 막(끝)에 이르게 되는 것을 어딘가에 부딪혀 중단하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 '끝'이라는 의미가 이미 성립된 상태에서 의미적 파생을 통해 생겨난 말일 것이고, 마감, 은 '막,' 그러니까 끝이라는 의미가 덧붙임 없이 보전되어 있는 말이다. 막혔던 것은 뚫리기도 하지만 마감은 말 그대로 끝이고, 또한 자발적인 끝이다. 마감을 자발적 엔딩으로 여기는 작가는 그 어디에도 없겠지만, 누군가가 하고 있는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명령할 때에조차 마감을 '시키라'고 하지, 그 작가, 마감해, 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막음, 과 마감, 을 구분하는 '영속성'의 면에서 마감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데드라인의 '라인'을, 마감일, 의 날(日)과 짝지어 없앴을 때, 마감이란 곧 죽음이 되는 것이다.

각설하고, 후배의 그 짧은 인용문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사람이 불멸한다면 사랑이라는 개념이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종교적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의 '자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자비, 또는 자애, 라는 것이 다름 아닌 empathy임을 알 수 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보편적인 괴로움의 순환 속에서, 만물을 관통하는 그 괴로움에 진심으로 함께 괴로워하는 것이 불교적인 사랑이다. 기독교적 사랑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는 구절인데, 사람이 모두 죄로 인하여 죽게 된 (condemned to death) 존재가 아니라면 그 사랑의 표상은 아마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V for Vendetta라는 영화를 보면, 독방에 갇혀 고문과 생체실험으로 죽어가는 발레리는 배급받은 화장지를 양동이에서 건져 그것을 말린 후 숨겨 놓았던 연필로, 자기 이후에 올 수감자에게 (얼굴도 모르는) 사랑의 편지를 쓴다. agency를 토론하는 세미나에서 그 영화를 공부할 때는, 선택권이 전혀 없어보이는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의 agency라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가 보잘것없는 토우(土偶)에 품은 연민이 사랑이다. 드라마에 시한부 인생이 그토록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죽을 존재에 대한 사랑만이 사랑이기 때문이어서다. 영원히 사랑해, 라는 말은 그러니까 일종의 mauvaise foi, 또는 bad faith인 셈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인간의 운명에 인코딩된 본질적 마감에 대한 정신승리 같은 것이다. 죽을 존재가 아니라면 사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모든 사랑은 본질적으로 죽음으로 대표되는, 삶의 contingency에 대한 성애이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마감'이라는 요소를 제거했을 경우 인간의 삶에 사랑이란 개념은 아마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불멸의 삶이 어떤 것일지를 상상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얼마나 상상력이 부족한지를 알려면, 숱한 외계인 영화에서 외계인을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하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주변에서 본 것 이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역사의 과정 중 아주 사소한 그 무엇이 살짝만 틀어져도 우리가 굉장히 다른 현재를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쓰여진 역사가 아닌 몸의 역사의 출발점에 그렇게 큰 차이가 생길 경우, 현재의 일상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마음 바쳐--허리 아래의 몸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사랑한 존재는 모두 인간이거나, 죽음은 아니어도 '둔갑'하면 제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님프였다.

동화 속의 영원한 해피엔딩 역시 사실 사랑의 엔딩은 아니다. Happily ever after (흔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번역되던 말이라는 점에서 영원에 대한 레퍼런스로 읽을 수 있으며, 왕자는 죽은 공주를 살린다는 점에서 동화 속 주인공들은 죽음에 대한 면역이 있는 것 같다) 는 불멸의 사랑에 대한 말인 것처럼 보이지만, 행복과 사랑은 다른 것이고, 그 동화의 어느 버전을 자세히 읽어보아도 왕자는 백설공주를 '사랑'한 적이 없다. 그 부부는 어쩌면 서로 사랑하지 않았기에 '영원히'--죽기 전까지가 아니라--행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영원히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엔딩보다 현실적인 것은, 후자가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배되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서로 사랑'이라는 말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쌍방 중 하나의 삶에 마감이라는 결정 요소가 없는 경우 둘은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잠정적 결론이고, 이 결론은 아가페와 에로스에 동시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자신의 열정에 어떤 형태로든--나의 죽음이든, 상대의 죽음이든, 사랑의 종말이든--마감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모른척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의 시발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괜히 사랑 죽음 마감 막음이라는 말을 다 넣어서 글을 한 번 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