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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13.95 근황/ radioactive decay로서의 삶, 에 관하여

배설의 화석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작희
원고번호 1

Radioactive Decay로서의 삶, 에 관하여


눈을 감으면 절로 눈물이 나는 때가 있다. 요즈음이 좀 그렇다.

비교문학199 세미나는 네 명이 듣는 수업이다. 파키스탄-우크라이나 혼혈의 아이샤는, 학기 초 조기졸업 예정자인 내가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을 때 세 명보다는 네 명이 낫다고 말해 주었다.

레이첼은 동부의 보딩스쿨을 졸업하고 서부로 대학을 왔다. 전형적인 미국 가정에서 자라 조금 비전형적인 전공을 택했다.

알베르또는 엘살바도르 이민 가정 출신이다. 뉴저지에서 자랐고, 나이를 세는 숫자에 -teen이 붙자마자 여자친구를 사귀고 갈아치우기를 반복한다는 여느 라티노 소년들과는 달리, 알베르또는 공부벌레요 시인이었고, 그래서 여러 남자 친척들은 그런 말라깽이 조카를 까만 양처럼 대했다고 한다. 아프로 머리에 콧수염을 하고, 60년대 히피를 연상시키는 청재킷이나 꽃무늬 셔츠, 가끔은 까만 가죽치마--아, 알베르또는 게이이다--를 입고 나타난다.

우리는 주노 디아즈와 톨킨을 공부한다.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만나 세 시간짜리 토론을 한다. 몸과 사랑과 인종적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층적 언어를 논한다.

치까노--히까노, 쉬까노, 왓에버--인 교수님과 알베르또는 가끔 스팽글리쉬로 되어 있는 단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무심코 스페인어를 한 마디 던지고는 내 쪽을 보며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풀이해준다. 고마운 제스쳐이기는 해도 나는 문맹이 아니기에--그러니까, 보까가 입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듣고도 남는다는 이야기다--가끔 기분이 묘하다. 사실 이곳에 와서 중국이나 기타 아시아 쪽 문학 수업을 들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내 입지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샤와 레이첼과 재키는 졸업논문을 쓰고 있고, 알베르또는 졸업 프로젝트로 시를 한 묶음--그러니까, 시선을--준비하는 중이다. 


삶이 서걱거린다. 그 서걱거림을 알아듣는 양 요즈음의 불여우는 추락이 잦다.


라디오액티브 디케이라는 것은 특이한 개념이다. 반감기는 말하자면 반쪽짜리 삶이고, 인생도 방사성의 물질처럼 불안정하기에 한 삶이 시작되는 순간 그 삶은 이미 그 반감기의 주기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부패하도록 코딩이 되어 있는 존재랄까. 다만 그 부패가 단순 부패가 아닌 방사성의 부패인 것이다.

삶은 늘 온전하지 않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고, 둥근 어지자지의 인간들이 벼락을 맞아 반으로 쪼개진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랑이 끝나기만을 위해 시작하는 것도 그 반증이다.

다만 기왕 부패하고 소멸하고 있는 삶이라면 방사성의 삶을 살고 싶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오늘의 내가 눈을 감아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알베르또가 싼드라 씨스네로스의 시 Dulzura (번역하면 감미, 쯤 될는지)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기 때문이겠다.


Dulzura

Make love to me in Spanish.
Not with that other tongue.
I want you juntito a mi,
tender like the language
crooned to babies.
I want to be that
lullabied, mi bien
querido
, that loved.

I want you inside
the mouth of my heart,
inside the harp of my wrists,
the sweet meat of the mango,
in the gold that dangles
from my ears and neck.

Say my name. Say it.
The way it’s supposed to be said.
I want to know that I knew you
even before I knew you.


벌써 반바지를 입어도 좋은 2월의 팔로알토에서
반감성 소멸의 삶을 사는 중의 작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