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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15 대안적 사랑

원고번호 1
작희

대안적 사랑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알랑 바디우, 사랑 예찬)

I recognize you means that I cannot know you in thought or in flesh. The power of a negative prevails between us. I recognize you goes hand in hand with: you are irreducible to me, just as I am to you. We may not be substituted for one another. You are transcendent to me, inaccessible in a way, not only as ontic being but also as ontological being (which entails, in my view, fidelity to life rather than submission to death).

나는 너를 인정한다는 말은 곧, 내가 너를 생각으로나 몸으로나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너와 나의 사이는 부정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내가 너를 인정한다는 말은 곧, 너는 나에게 축소와 제한이 불가능한 그 어떤 존재라는 뜻이며, 나 역시 너에게 그러한 존재이다. 서로에 대한 대체재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실존적 의미에서든 본질적 의미에서든 너는 나에게 초절적이고, 어떤 의미로는 닿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상호적 부인은 내 생각에는 죽음에 대한 굴종이라기보다는 삶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 Luce Irigaray, "Toi, qui ne seras jamais moi ni mien," in I Love to You

~ 뤼스 이리가레, "절대 내 것이 되지 않을 너에게" 중

나와 너 사이에 있는 틈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몸을 꼭 껴안아도 메울 수 없는 틈. 그 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사랑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내가 요코에게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오사키 요시오의 소설 <아디안텀 블루>, p.229


내 것이 되지 않을 너에게, 네 것이 되지 않을 내가!

보통은 '너'보다는 '당신'이라는 말을 나는 더 좋아한다. 이리가레가 2인칭의 대명사로 vous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두 주체를 동등한 대화의 플랫폼에 올린다는 의미였겠지만 (vous는 어디까지나 복수형이고, 단수와 복수의 대화는 아마도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라는 말이 나는 참 좋다.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이라는 시를 보면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또한 헤겔의 인정에 부합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헤겔의 recognition은, 두 동등한 주체가 서로의 의식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으로, 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객체로 삼을 경우 recognition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recognition을 이상적 관계의 모델로 삼았을 때에, 자연의 달은 관계를 맺지 못한 원자적 상태에 있으며, 그 달이 '나'라는 다른 주체에게 다가왔을 때에 그 달은 관계 속에서 '당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당신'이 된 타자는 결코 내가 아니기에,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 없는 참혹' 같은 것이 두 주체가 맺어가는 관계인 것이다.

내가 소유한 것이고 나에게 총체적 책임이 있는 것이 전통적 주객의 관계라 할 때, 타자는 나에게 객체이므로 나는 그를 인지할 뿐 (perceive) 인정할 수 없으며, 또한 객체와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 역시 주체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권리이다. 두 주체가 인정을 기반한 관계를 맺었을 때에, 타자는 자신만큼이나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고, 따라서 그를 지우거나 버리거나 물러 버릴 권리는 나에게 없다. 종속이 없다는 의미에서 인정적 관계는 무정한 관계로 들릴 수 있으나, 실은 세상에 종속만큼 쉬운 것은 없고, 우리 모두는 대부분, 사랑을 빙자하여 타자를 종속하며 살아간다.

우리말에 돌려 말하기(circumlocution)가 참 많다지만 '당신'이라는 말이 가히 그 최고봉이다. '자기 (스스로의 몸)'을 높여 말한 것이 '당신 (해당하는 몸)'이고, 너라는 인간 대신 너의 몸까지만을 나의 발화와 인지(perception)의 영역으로 한정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인정의 제스쳐인지.

제목은 대안적 사랑이라고 붙여 놓았어도 사실 이 연재는 사랑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건설적이고 아름다운 그 무엇인가가 정말로는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고, 그럼에도 굳이 대안적 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상에서 대안적 방향을 취했을 때에야 비로소 본질에 달할 수 있기에, '대안적 사랑'을 논하여 진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대충 그림을 그려 보고자 한다.

상대방을 주체로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 말로는 정말 쉬운 일이다. 그냥 나는 나, 너는 너, 라고 간단히 선을 그으면 되는 일인 것을. 하지만 내가 인정하는 타자는 정말 그 타자일까, '내가 볼 수 있는' 타자의 일면일까. 후자를 타자의 전체로 생각하고 그것을 '너'라고 부른다는 것이 현상적 사랑의 최대의 문제점이다. 타자의 '인지불가능성'을 전제로 한 관계를 우리는 시작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관계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는 세상을 믿는 것은 세상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인지적 소유권의 행사인 것이다. 나의 인지영역 밖에 내가 있으며, 내가 아는 너는 네가 아닌, 내가 아는 너, '내가(주어) 너를(목적어) 알다(서술어)' 의 문장구조에서 목적어적 역할을 하는 어떤 개념임을 인정하는 것이 대안적 사랑의 출발점이다.

문학에서 실례를 들어보자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있다. 험버트 험버트는 그래도 일반적인 Lover보다는 오히려 훨씬 나은 것이, 그는 애초부터 자신의 롤리타와 돌로리스 헤이즈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갭이 존재하며, 그 갭을 건너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 채로 묘사를 시작한다. 험버랜드의 롤리타와, 험버랜드 밖에 존재하는 소녀 사이에는 인지자인 험버트 이외에 그 어떠한 접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험버트의 세계 내에서 롤리타는 그저 롤리타, 애너벨 리의 환생, sin of his soul, fire of his loins인 것이다. <롤리타>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소녀가 아니라 자신이 소녀에서 읽어내는 판타지요 실상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창작물임을 인정함으로써 시작되는 소설이다.

소설 중간쯤에서 험버트는 실제로 롤리타에 대하여 solipsize라는 동사를 사용하는데, solipsism의 국문 번역은 '유아론 (유일하게 나만 존재)'이다. 관념론주의 철학자 브래들리에 따르면 유아론적 세계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나는 경험을 넘어설 수 없고 경험은 '나의' 경험이다. 이로부터 나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자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즉 험버트가 만들어내는 롤리타에 대한 환상은 외부 세계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니고 자아의 연장, 궁극적으로는 모종의 나르시시즘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모든 사랑은 나르시시즘이다. 내가 없는 것을 지닌 상대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나의' 결핍에 대한 충족, '나의' 그 무엇에 대한 사랑이며, 그래서 유아주의적 애정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넘어설 수 없기에, 모든 인지가 나의 세계의 범주에서 벌어지는 활동이듯 모든 사랑 역시 나의 세계에 대한 사랑이다. 타자가 자아의 인지활동을 거치지 않고 자아의 세계 안으로 들어올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타자를 그렇게 흡수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경우 자아는 타자를 파편화시켜야만 한다. 조금 더 극단적 비유를 사용하자면 타자를 내 것으로 하는 활동은 대부분 타자를 조각내어 섭취(ingest)하는 양상을 보인다. 롤리타의 첫 문단에서 험버트 역시, 사랑하는 소녀의 이름조차도 음절음절 조각조각 나누어 그 소리를 하나하나 입 안으로 집어넣지 않던가. 험버트의 롤리타에 대한 묘사 역시 파편화 기법에 의존하여, 몸의 각각의 부분을 모자이크처럼 묘사한 후 재조립한다. (롤랑 바르트는 S/Z에서,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몸을 묘사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페티시적 활동이라고 말했다.) 사랑이란 그래서 식인(anthropophagy)적 활동이기도 하다고 조심스레 말해 본다.

소아성애자 험버트가 그래도 우리 중 대다수보다 낫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사랑도 항상 험버트적 유아주의의 사랑이지만 우리는 (험버트보다도 못하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아 깬다'라는 순간이 존재하는 것도 모두, 결국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환상 이외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한동안 좋아하는 사람을 '그분'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래서 나는 대안적 사랑을 주장한다.

네가 내 안으로, 내가 네 안으로 온전히 들어올 수 없음을 알고 (성적인 메타포에 낄낄댈 이들도 있겠으나 그런 결합을 통해 내가 네 안으로 온전히 들어간다면 왜 현자타임이 존재하겠는가!), 그 좌절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대안적 사랑이다. 너를 온전히 인지할 수 없고, 내가 보는 너의 물리적 현상(즉 당신)이 내가 너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이며, 그조차도 너에 대한 소유일 뿐 너라는 주체는 소유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생각해 보는 것. 그래서 위에 인용한 <아디안텀 블루>의 류지는 '틈'을 말한다. 나와 너 사이의 거리가 마이너스(!) 일 때에도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작은 틈--너를 내가, 내가 너를 온전히 알지 못하게 하는--에 대해 숙고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지 자체가 대안적 사랑이다.

공기가 없는 공간에서 (그러니까 소리쳐도 들리지 않고), 멀리 떨어진 절벽 양 끝에 선 채 (몸짓조차 잘 보이지 않을 때) 서로를 좌절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대안적 사랑이다. 절벽이라는 이미지는 썩 좋은 비유라고 생각된다. 이리가레도, 그 거리라는 것이 자칫하면 자살충동을 부르는 좌절을 부를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인지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이 죽음이 아닌 삶에의 의지라는 이리가레의 말에 동의한다. 왜 가까이 있으면 안 되느냐고? 가까이 있으면 서로를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딱 좋은 환경이라서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 <제부도>, 이재무 中


거리를 인정하는 것, 이해할 수 없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영원히!) 너와 나 사이의 관계 그 자체를 생각하는 '행위'가 사랑이고, 굳이 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우리 모두가 험버트이고 인지적으로 우물 속에 빠져 있음을 인정할 때에 대안적 사랑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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