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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16 페스츄리 봉투에 적다

페스츄리 봉투에 적다

차고 슬픈 것이 어른대는 날이면 생각이 새끼를 친다 이 더운 고장 창가에는 냉기가 감돌지 못하여도 방 한켠에 소복이, 머리카락과 엉기어 가는 연필 꾹꾹 눌러 흰 편전지에 담은 네 목소리에서 먼지를 털어 볼까 하다가 문득 참는 것이다 국방색이 가득한 막사에서 밤을 잘라 편지를 썼을 너를 생각한다 혹시라도 반송되면 우표 좀 더 붙여 꼭 부쳐 달라고 봉투에 눌러 당부해 적은 말과 너의 어머님의 얼굴을 함께 생각한다 편지와 시 나부랭이와 빗소리 섞인 피아노 음악을 네 속에 심어두고 물 주어 기른 사람은 아마도 나였을 것인데 그 씨앗이 무엇이 될지, 그때 나는 아마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세월의 지층을 헤집으며 나는 또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임을 세월은 갈라지고 합쳐지고 다시 갈라져 가는 것임을 생각한다 옛말로 사랑은 괴는 것이라 했단다 내 안에 고여 가던 것이 나뿐이라 이곳엔 눈도 나리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맘속에 불편하게 고여날 적에 고이고 고여 큰 저수지가 되어 그 속에서 검은 머리채부터 둥둥 춤추듯 부유하는, 소리 질러도 공기와는 다른 물의 파동에 벙어리가 되어버린 시간의 혼백을 생각할 적에 그 적에 이 덥고 마른 고장에도 쇳조각 같은 비가 물밑 유리지붕을 깨부술 듯 두드리는 것이고 나는 그 지붕이 정말로 깨지어 그 파편을 잇새에 넣고 씹을 때에 비로소 머리칼부터 떠오른 그 불어오른 몸뚱이를 건져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문 논처럼 혓바닥과 입천장이 갈라져 쇠 맛으로 스며올 때에 바로 그 때에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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