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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11 세상은 어찌 보면 아름다운 곳일지 모르나 편집장 쟐롭을 사악하다 사악하다 부르지만 역시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잘못입니다. 마침 오늘은 크리스피크림 도넛을 세 개 먹었으니 이대로 자다가는, 이틀 뒤 귀국을 했을 때 빼빼로 같은 서울 여자들을 본 후 저의 스트레스가 너무 클 듯 하니, 밀린 원고라도 완성하고 자겠다는 심산으로 글을 씁니다. 원고번호 1 작희, 잭희, 자키베틀라나, 키베틀라나, 키배뜰... 아닙니다. 세상은 어찌 보면 아름다운 곳일지 모르나 본 웹진의 편집장 쟐롭은, 배설은 희망을 찾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힐링 블로그가 아니라고 말했다. 먼젓번 원고도 사실은 '멸종'에 대한 이야기이니, 그다지 희망적인 이야기는 못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민족의 정서는 '웃음으로 눈물 닦기,' 즉 웃으면서 체념하기가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나는 진로 .. 더보기
#10 만일 이 모든 것이 실패한다 해도, 내게는 공립도서관이 있다 원고번호 1 작희만일 이 모든 것이 실패한다 해도, 내게는 공립도서관이 있다 몇 달 뒤면 속절없이 대졸자가 되어 버린다. 다른 학생들처럼 휴학을 할 여유도 내게는 아마 없다. 집에서는 그냥 빨리 내가 졸업하기를 바라는 눈치다. 그래도 내가 이곳에 옴으로 해서, 가계의 씀씀이가 조금은 줄었을 테니, 내가 졸업을 일단 하고 나면 가족들은 조금이라도 저축을 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르겠다.사실 모든 것이 실패하는 상상은 수도 없이 했다. 실비아 플래스처럼,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안 해 본 것이 아니다. 다만 그녀는, 쓸쓸한 포스트모던의 시대 중년 여성으로서 오븐이라는 사지를 택한 것이기에, 그 방식은 이십대 초반, 곧 초중반의 나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전에 모 커뮤니티에 자살하는 일.. 더보기
#9 풍선의 무덤 1 선배 한 분이, 요즘은 소설은 쓰지 않느냐고 물어셨고, 그래서 소설을 한 번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지인 중에 내가 쓰려고 하는 이런 종류의 소설을 아주 싫어하는 이가 하나 있는데 (굳이 외국에 배경을 둠으로써 불필요한 타자화를 실현하고 타자에 대한 환상을 풀어내는 류의 글), 그는 아마도 이 웹진을 읽지 않을 것이기에 아마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원고번호 1 작희 풍선의 무덤 1 일주일 전부터 풍선이 한두 개씩 비어 간다 싶었던 것이 오늘은 세고 또 세어도 꼭 다섯 개가 모자란다.네가 잘못 셌다고 생각해, 따냐는 말했고, 내가 사칙연산에 나쁜 것도 사실이다 싶어 풍선을 색깔별로 나누어 다시 세었다. 따냐는 손이 잰 편이라, 무지갯빛 콜리플라워 같던 풍선 다발이 그 손에 들려 삽시간에 .. 더보기
#8 하나 반의 고향 1 원고번호 2 작희하나 반의 고향 1 일전에 배설 필진의 모 멤버가, 너의 글에서 망명작가의 냄새가 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슨 의중으로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의 아이러니가 섞인 발화임은 분명했던 것이, 나는 망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내가 도피자가 아닐지언정, 나는 망명 작가들의 글을 좋아한다. 영어로 피신해 오는 이국의 언어 화자들이 좋다. 그렇게 한 다리를 건넌 영어로 쓰인 글은 늘 어디론가 도망하고 있는 것만 같고, 단어와 문장으로 쌓아올린 벽을 벽돌 하나 단위로 다른 곳으로 옮겨 보면 그 모든 것은 사실 거대한 심연을 가리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는, 그런 허망한 속임수의 느낌을 준다. 같은 이유로 나는 미대 입시생들이 곧잘 그리는 공간 구성 작품을 좋아한다. 흑연 가루가 도화지의 요철을 .. 더보기
#7.5 부재에 대하여 (흔한 연애글) 원고번호 1 작희 전에 사라 룰이 쓴 고인의 핸드폰, 이라는 연극을 보고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그 리뷰를 번역하여 올리려고 했는데, 번역하는 나도 번역한 것을 읽는 독자도 너무나도 괴로울 것 같아 참았다). 고인인 고든은 장기 밀매상으로, 심장마비로 인해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 바람에 생전의 사업이라든지 개인사 문제 같은 것들을 다 마무리하지 못해, 그의 핸드폰을 엉겁결에 가족에게 전해주게 된 진은 (핸드폰이 그녀의 손을 떠날 때까지, 그리고 떠난 후에도) 삶에서 끊임없이 저 세상 사람인 고든의 존재를 느낀다.그가 입대 전 예약전송으로 하루에 한 통씩 내게 이메일이 오도록 설정을 해 두고 간 모양이다. 누군가의 대역을 하기 위해 나에게 보내져 오는 모든 것들은 이상하게도 존재감을 지니기보다는 블랙홀 앞에.. 더보기
#7 눈썹이 이상해졌다 원고번호 2 작희 눈썹이 이상해졌다 올 여름, 학원에서 조교로 일을 하며 자습이나 시험 감독을 하는 일이 잦았다. 고개를 숙인 학생들의 이마를 나는 내려다보았고, 나를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통유리창으로 햇빛이 비치면 여자아이들의 이마에, 솜털이 머리칼로 촘촘히 이어지는 것이 보여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정리되지 않은 눈썹이 돋은 미간과 눈꺼풀이 낯설었다.간만에 자세히 본 열 살 여동생의 눈꺼풀에도 솜털과 눈썹이 보송했다. 좀 비었다 싶어도 채워넣지 않고, 무성하다 싶어도 뽑지 않는 것이 젊음이라고 생각했다.이곳은 10대 초반부터 소녀들이 눈썹을 원하는 모양으로 다듬는 것 같다. 세미나에 들어가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눈매며 화장을 꼼꼼하게 살피며,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덧바름일까를 생각해.. 더보기
#6 육체여 안녕: <사형장으로부터의 초대>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2 이전 글은 이곳을 참조하십시오. 육체여 안녕: 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계속) 신시나투스를 '육체적 불완전함'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영적 완전함에 한 발짝 더 가까운 상태)을 갖춘 성인으로 보는 데에서 지난번 글을 끊었었지요. 그의 성인적 면모는 단지 외모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생명체라면 누구라도 지녀야 할 생존의지--먹고, 자고, 성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반대로, 생존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은 신시나투스의 아내인 마르테입니다. 마르테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으로 소개됩니다. 우윳빛 피부에 커다란 가슴과 통통한 허벅지, 장밋빛 뺨을 가진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나바코프는 그녀의 허벅지 속살이 "tender, quivering"하다고 써 놓았네요. 다시 말해 그.. 더보기
#5 미뢰 왜 끊임없이 글 번호가 4.5에서부터 반절되는가 하면, 제논의 역설에 대한 오마쥬적 표현이다. 써놓고 보니 아마 나는 그에게 커피 같은 사람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작희미뢰에 대해 "나에게 있어서 사랑은 밥 먹는 일의 즐거움 같은 것이다.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는 심한 섭식장애에 걸려 있었고, 뭐든 먹지 않겠다고 꼭 물에 던져진 패류(貝類)처럼 입을 꼭꼭 다물었던 나에게 먹는 일의 즐거움을 가르쳐준 사람이 그였다. 먹는 일의 즐거움을 '찾아' 주었다는 표현 또한 아마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집은 먹는 일에 그렇게 집중하지 않았고, 그냥 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 할 일을 하는 정도로, 음식물은 '섭취'되어야 하는 그 무언가였지 즐길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비린 것과 단.. 더보기
#4.5 인생 '캐삭'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작희인생 '캐삭'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한다. 자살보다는 그저 인생 캐삭 같은 개념으로 보시면 될 것 같다. 그냥 캐릭터를 삭제하고 인생 게임 자체에서 로그아웃을 해버리고 싶다. 딱히 캐릭터의 능력치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다 (키가 조금 더 컸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후회가 있다면 아마 전직을 잘못 했다거나 하는 정도일 것 같은데, 그냥 잘 모르겠다. (다시 고를 수 있다면, 수학을 적당히 잘 하는 적당히 머리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스카프에서 공부하고 해외로 유학을 갔다가 교수가 되는 뭐 그런 정도의 캐릭터를 키우고 싶은데, 지인에게 말해 보았더니 그 역시도 적당하지 않다고 했으니 뭐든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 플러스 원 씨랑 이 이야기를 했는데, 다른.. 더보기
#4 육체여 안녕: <사형장으로부터의 초대>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1 편집장이 쪼기 전에 10월호 글을 미리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은 미리 쓴다기보다는 예전에 수업시간에 썼던 글을 번역 및 수정하고,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배경지식 설명을 앞머리에 많이 덧붙인 것입니다. 10월호의 주제는 '이별'인데, 보다 원론적인 이별을 논할까 합니다. 2013년 5월 9일 영어로 씀 본 블로그에 발행 날짜는 번역된 시점과 일치함 육체여 안녕: 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원제: Beheading as the Negation of Bodily Presence: Invitation to a Beheading as a Gnostic Allegory to the Negation of the Physical) ~ 에두아르도 가르씨아 베니토의 1938년 스케치, 샤넬을 위한. 글을 쓸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