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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육체여 안녕: <사형장으로부터의 초대>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2 이전 글은 이곳을 참조하십시오. 육체여 안녕: 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계속) 신시나투스를 '육체적 불완전함'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영적 완전함에 한 발짝 더 가까운 상태)을 갖춘 성인으로 보는 데에서 지난번 글을 끊었었지요. 그의 성인적 면모는 단지 외모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생명체라면 누구라도 지녀야 할 생존의지--먹고, 자고, 성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반대로, 생존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은 신시나투스의 아내인 마르테입니다. 마르테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으로 소개됩니다. 우윳빛 피부에 커다란 가슴과 통통한 허벅지, 장밋빛 뺨을 가진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나바코프는 그녀의 허벅지 속살이 "tender, quivering"하다고 써 놓았네요. 다시 말해 그.. 더보기
20.09.13 그저 화장실에 가고싶어서, 표지판을 따라 걸었지만 문이 잠긴 장애인용 화장실뿐이었다. 두 칸짜리 계단에 걸터앉은 동양인 여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별로 가망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급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화장실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독일어를 할 줄 모른다고 했고, 나는 떠듬떠듬 영어로 다시 말했다. 독일어에 익숙해진 입에서 가끔씩 영어를 꺼내려면 꽤나 큰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녀는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지만 문이 잠겼다고 했고, 나에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보았다. 독일에서 역사 구석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지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영어가 꽤나 유창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무언가를 질문할 틈도 없이 끊임없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수상.. 더보기
#5 미뢰 왜 끊임없이 글 번호가 4.5에서부터 반절되는가 하면, 제논의 역설에 대한 오마쥬적 표현이다. 써놓고 보니 아마 나는 그에게 커피 같은 사람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작희미뢰에 대해 "나에게 있어서 사랑은 밥 먹는 일의 즐거움 같은 것이다.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는 심한 섭식장애에 걸려 있었고, 뭐든 먹지 않겠다고 꼭 물에 던져진 패류(貝類)처럼 입을 꼭꼭 다물었던 나에게 먹는 일의 즐거움을 가르쳐준 사람이 그였다. 먹는 일의 즐거움을 '찾아' 주었다는 표현 또한 아마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집은 먹는 일에 그렇게 집중하지 않았고, 그냥 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 할 일을 하는 정도로, 음식물은 '섭취'되어야 하는 그 무언가였지 즐길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비린 것과 단.. 더보기
'그림자와 이별하기'의 일부 K가 불쑥 말했다. 영국에 살았었다. 어릴 때? 어. 영국은 비가 자주 오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방에 있었어. 여기까지 말하고 K는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애의 콧등이 찌푸려졌다가 펴졌다가, 또 주름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가만히 걸었다. K의 새치가 가로등 밑을 지날 때마다 반짝거렸다. 영국에 살던 시절에도 K에게 새치가 있었을까. 왠지 그랬을 것 같았다. 영국 골방에서 비오는 날마다 외로워하는, 새치가 난 꼬마 K를 상상해보았다. 웃음이 났다. 왜 웃냐. 어렸을 때도 새치가 있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어릴 때의 나는 그냥 어린 나로 봐줘라. 그렇게 말하면서 K도 웃었다. 영국에서는 비틀즈를 들었어. 또 블러라던가, 아무튼 여러 밴드 음악을 들었다. 지금도 좋아하잖아. 그 때 만들어진 .. 더보기
짧은 인삿말 고통스러운 글쓰기에 도전해본다. 고통이 우리의 내부에 존재한다면, 글을 쓰면서 그저 내 안에 있는 고통을 꺼내오면 될 뿐이다. 하지만 고통이 우리의 외부에서 필요할 때마다 방문하는 것이라면 까다로운 주문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나는 오 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지만 여기에 무언가를 쓰고자 한다. 이런 상황이 나에게는 쉽지 않은 요구다. 평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글을 쓸 때는 특히 멍하게 생각을 하며 많이 지체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고통을 제대로 소환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글자수에 제한이 없는 이상 정말로 고통스러운 글쓰기는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지내는 방을 곧 떠나야 할 것이다. 운이 좋아서 테라스가 달려있고, 돌 틈으로 민들레 비슷한 풀들이 자라는 모습을 자리에 앉은 채 구경할 수 있.. 더보기
연옥 - 단막극 연옥 - 단막극:W.B. 예이츠의 에 대한 변주 by. 헥토르 이온 무대는 서커스 천막 안의 텅 빈 모습을 형상한다. 침대에는 곧 죽을 노인이 반쯤 상채를 일으킨 상태로 경직된 채 누워있고, 그의 바로 앞에는 그의 아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중요한 점은 아들은 관객들에게 오직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등만을 보여주어야 하며, 노인의 대사가 이어지는 동안 어떠한 움직임도 보여서는 안 된다. 노인: 이제는 나도 갈 때가 되었구나. 이제는 너와 이별을 해야겠어. 아들: (침묵) 노인: 너는 말이 없구나. 슬픈거냐, 아니면 나에 대한 증오 때문인거냐. 아들: (침묵) 노인: (한숨을 쉬며) 그런 건 지금 이 자리에서야 다 소용없는 일이겠지. 그저 너에게는 미안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구나. 아들: (침묵) 노인:.. 더보기
어떤 이야기(2) //어떤 이야기(1)과 (2)를 수정하였습니다. 바깥에 나와서 빛이 처음으로 만난 입자는, 외로운 성간물질이었다. 빛은 한 번도 외로워 본 적이 없어서 성간물질이 하는 말을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성간물질은 한동안 어떤 별의 일부였다고 했다. 빛의 시간 개념은 상당히 왜곡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한동안이 의미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으나 성간물질의 상태로 보아 꽤나 긴 것임이 분명했다. 그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해 나가기를 포기한 채, 잿빛 표정을 지으며 몹시 외롭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빛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결국 이야기는 성간물질의 고독함에 대한 주장으로 수렴했다. 그것은 무슨 느낌인가. 너무 멀다는 느낌이다. 무엇으로부터 멀다는 느낌인가. 과거로부터 .. 더보기
어떤 이야기(1) ○아아, 모국어가 멸종했다. 무시무시한 적막 속에서 거친 숨을 내쉬던 그것이 한순간 숨을 멈추었다. 세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고요해졌으므로, 소리의 없음이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다. 본래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은 곳에서 결핍감이 느껴질 리가 없다. 이 순간을 조각으로 남긴다면 팔의 단면이 말끔하게 잘려나간 형태의 흉상이 어울린다. 가슴 아래는 이 느껴질 기미도 없이 시원하게 부재한다. 이 이야기는 아주 짧고 간결한 침묵의 시간을 위한 이야기다. 그것이 다시 노래하기 시작할 때, 이야기는 비로소 다시 잠에 들 것이다. ○어두운 한 가운데에 빛이 놓여있다. 동굴 천장에 구멍이 뚫려 생긴 것처럼 동그랗고 환한 모양으로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빛은 탁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 위에서 .. 더보기
#2.5 1시 55분 - 내일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를 불러냈다. 약속 시간은 2시. 그는 약속 장소에 10분정도 일찍 도착하곤 했다. 그는 지금쯤 까페에 들어가 있겠지. 그리고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직감이 여자에게만 있진 않다고 말하던 그였으니. 그리고 마지막 수를 세고 있겠지. 공격이든 방어든. '무슨 일로 불렀어?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나를 맞이할 것이다. 그것도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천연덕스러움으로. 혹은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옷은 어떻고 머리는 어떻고 하면서 안부를 먼저 물어올 것이다. 시작은 미소, 그리고 반 톤 정도 높은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그 순간에 그는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낚아채갈 것이다. 나는 이제 그걸 뚫어야 하겠지. .. 더보기
#4.5 인생 '캐삭'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작희인생 '캐삭'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한다. 자살보다는 그저 인생 캐삭 같은 개념으로 보시면 될 것 같다. 그냥 캐릭터를 삭제하고 인생 게임 자체에서 로그아웃을 해버리고 싶다. 딱히 캐릭터의 능력치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다 (키가 조금 더 컸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후회가 있다면 아마 전직을 잘못 했다거나 하는 정도일 것 같은데, 그냥 잘 모르겠다. (다시 고를 수 있다면, 수학을 적당히 잘 하는 적당히 머리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스카프에서 공부하고 해외로 유학을 갔다가 교수가 되는 뭐 그런 정도의 캐릭터를 키우고 싶은데, 지인에게 말해 보았더니 그 역시도 적당하지 않다고 했으니 뭐든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 플러스 원 씨랑 이 이야기를 했는데, 다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