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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심연

20.09.13

그저 화장실에 가고싶어서, 표지판을 따라 걸었지만 문이 잠긴 장애인용 화장실뿐이었다. 두 칸짜리 계단에 걸터앉은 동양인 여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별로 가망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급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화장실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독일어를 할 줄 모른다고 했고, 나는 떠듬떠듬 영어로 다시 말했다. 독일어에 익숙해진 입에서 가끔씩 영어를 꺼내려면 꽤나 큰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녀는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지만 문이 잠겼다고 했고, 나에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보았다. 독일에서 역사 구석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지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영어가 꽤나 유창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무언가를 질문할 틈도 없이 끊임없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수상한 느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까 했지만 내가 두려워 할 만한 상대를 아닌 것 같아 순순히 답해주었다. 빈틈이 생기자 역으로 내가 질문을 했는데, 직업을 가지러 독일에 왔고 친구네 집에 머무른다고 했다. 독일어는 할 줄 모르면서. 그녀는 나에게 무슨 정보를 얻고 싶은건지는 몰라도 페이스북을 하느냐며 내 이름을 달라고 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내 이름으로 검색해봤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기에 적어주었다. 바쁘지는 않았지만 화장실에 가고 싶었고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과 대화하기가 싫어서 계속 가야하는 것 같은 티를 냈더니 그녀도 일어나서 나를 따라왔다. 이 역에서 친구를 만나기로해서 기다린다고 했다. 개찰기 앞에서 헤어지면서 나는 단지 도움이 필요했을 뿐인 사람을 매몰차게 대했다는 죄책감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봉변이라도 당할 가능성을 줄였다는 만족감을 동시에 가졌다.


***





그가 한참동안 필드스코프를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아직도 졸음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바다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안개 없이 수평선까지 보이는 상태였다. 물은 걷어올려진 치맛자락처럼 저 위에 있었고, 점처럼 박힌 새들이 갯벌을 뒤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쌍안경을 눈에 대보았지만 작은 도요새들을 식별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알꼬마는 니가 셀래?"

갑작스럽게 그가 말문을 열었다. 여기가 고비였으니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했다.

"너무 많은데... 할게요."

도감 속에서 보는 새들은 특징이 너무나 명확했다. 배가 희면 흰 것이고 부리가 조금 더 길면 긴 것이었다. 눈테의 색이 더 진한 것이 있었고 다리의 색이 확연히 다른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쌍안경을 통해 보는 새들은 어째 나안으로 보는 것보다 눈은 아프면서 도저히 구별이 가질 않았다. 물론 크기에 따른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구분이야 할 수 있었지만 확신을 갖고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백 사십...칠 마리요."

"그래. 그럼 거기다가 노랑부리백로 네 마리 추가하고, 민물도요 열두 마리 더."

사람의 눈에는 한계가 있으련만, 선배들은 너무나 쉽게 새를 알아맞췄다. 그러나 내가 도감을 보며 공부를 하고 사진을 보며 연습을 해도 실제로 망원경을 통해 보는 순간 새들은 특징을 잃어버렸다. 분명히 내가 아는 새들 중 하나일텐데 내가 아는 어떤 특징을 갖다 대도 완전히 부합하지 않았다. 대신 특징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다보면 새의 종류로서 가능한 선택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느낌이었다. 논리적으로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느낌에 맞냐 맞지 않냐의 문제가 되었을 때, 머뭇거리다가는 앞에서 해 온 판단들이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아무리 많은 정보가 주어져도 최후의 순간에 결정하는 건 순전히 과감한 결단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건 아마 개꿩이겠죠?"

"어디?"

"저기 청다리 도요 옆에 있는 애요."

그는 필드스코프를 살짝 돌려서 입을 살짝 벌린 채 좁은 렌즈를 통해 멀리 있는 새들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그는 갯벌에 드나드는 물의 자락을, 아니면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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