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 <배설>/심연

쟐롭은 (부)조리하다.

쟐롭은 (부)조리하다.



심연


모국어라는 것은 역시 공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내가 모국어를 훌륭하게 구사하고, 여러 가지 단편적인 요소들로 모국어를 향유한다고 해도 그 공간이 외국어의 공간이라면 끝없는 갈증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한편 외국어의 공간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더라도 모국어를 잊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얼마 전 나는 꿈에서조차 외국어를 사용할 정도로 일순간 모국어로부터 멀어진 느낌을 받았는데, 쟐롭의 글을 다 읽은 것도 아마 그 즈음이 아닌가 싶다. 사실 쟐롭의 글을 읽기로 한지 대체 몇 개월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미루고 미뤄서 기한을 넘기고 넘긴 끝에 모국어가 그리워지자 급기야 쟐롭의 글까지 읽게 된 것이다. 과연 그것이 모국어에 대한 나의 향수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는지 부정적으로 작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다 읽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잘린 머리-부조리극>을 말이다.(사실 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에 느꼈던 급격한 허무함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쟐롭은 이미 초반부터 탐정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음을 알려주지만 글을 읽다보면 웬걸 그 사실조차 잊고 사건의 추이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된다. 특히 마지막의 결혼식 장면에 와서는 그만 안도해버렸는데, 이렇게 가드가 풀린 상태에서 모두 끝장나버리는 결말로 이행해버리니 KO패다. 이건 내가 너무 오랫동안 읽는 바람에 앞의 내용을 충분히 머릿속에 담지 못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속된 반 푼어치 해피엔딩으로 흐르다가 한참 전에 예고되었던 강펀치를 날리는 건 역시 쟐롭답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아직도 어떻게 그런 결말이 난 건지 이해는 안 되지만, 이를 이해불가능성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읽어도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 쟐롭은 원래 부조리한 작가다.

 

한층 더 부조리했던 것은 도대체가 속되면서도 결코 우리말의 것은 아닌 글투였다. 쟐롭이 우리 문학에 무지한 것은 아니지만 그 문학적 기원을 찾자면 반도 밖으로 시선을 옮겨야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80년대에 번안된 추리소설 혹은 동시상영관에서 틀어주던 뻔한 추리영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지금으로서는 희귀한 느낌의 글투를 즐길 수 있었다. 쟐롭의 문필 경력이 그렇게 아주 길지는 않을테니 그는 한국 작가들보다는 번역가들과 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쟐롭은 멈추지 않고 그가 흡수한 문학적 자양분들을 지렁이처럼 다시 뱉어낸다. 쟐롭의 문학적 취향을 안다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피식거릴 만한 장면이 참 많을 것이다. 표현이나 장면, 모티프가 그가 좋아했던 소설들의 어딘가에 위치한다는 것은 다분히 유희적이다. 마치 쟐롭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학적 취향에 푹 젖은 이 소설 속에서 함께 놀아보자고 권하는 듯하다. 이것을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나, 무덤 속에서 송장들을 불러 일으켜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조금은 섬찟했다. 사지가 절단되어 야산에 버려진 위대한 반역자들에게 바치는 오마주 같았기 때문에 나 같은 소시민은 감히 따라 부르지 못했다. 작금의 척박한 토양 위에서 쟐롭이 인정받을 가능성이 희박한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은 쟐롭의 한계이기도, 가능성이기도 하기에 말을 길게 하지 않겠다.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쟐롭이 제시하는 인간의 부조리함이 꽤나 낡은 질문 포인트라는 것이다. 어느새 모던하다는 것이 고색창연한 시대가 되어버렸으므로. 하지만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이렇게 낡은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세계가 사리분별에 맞는 것이 될 때까지 노력을 기울인 덕에 인간은 이질적인 곳, 말하자면 외국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모국어는 부조리다. 그들은 부조리를 잊지 못하며 항상 부조리에 대한 갈망 속에서 살아간다. 쟐롭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문학은 문학이 아니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문학이 된다.

'구 <배설> > 심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루타로 향하는 좁은 길(2)  (0) 2013.10.05
이별의 사유화인가 사회화인가  (0) 2013.10.02
20.09.13  (0) 2013.09.21
짧은 인삿말  (0) 2013.09.20
어떤 이야기(2)  (0) 2013.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