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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심연

여우비 여우비 서울보다 딱 한 뼘만큼 해가 높은 도시에 살았다 배를 충분한 물로 마땅히 채워야 했다 내다버려도 아침마다 거미줄 치는 거미새끼처럼 끈질기게 살았다 의뭉스러운 나의 취미는 풍선을 입에 문 채 킥보드를 타는 아이를 보거나 쭈그리고 앉아 사포질하는 노동자를 보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오면 그림자가 나를 맞아주었다 모든 것은 습관의 문제였다 장을 보고 나왔을 때 촉촉해진 아스팔트를 보면 소시지 치즈 닭고기 동전 영수증 눈물 초콜렛이 톡 떨어져 와르르 쏟아졌다 꼭 그래야만 했다 톡이 먼저고 와르르가 그 다음이었다 전부 제 갈 길을 가는데도 흘러내린 화장이나 챙기는 내가 우스워서 연극처럼 웃었다 거미가 웃으니 아이가 웃고 노동자도 따라 웃었다 텅 빈 자리에 간신히 매달아 놓았던 추가 톡 떨어져 무너졌다 *노트 .. 더보기
ground zero 거대한 폐허 깜빡이고 있는 구멍을 바라본다그곳말고 다 보여주던 테레비가 침묵한 장소를내가 바라봄을바라본다 이런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모든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할 수 있는 건 죽음혹은 만연하는 삶부채표 까스활명수로 나를좀 살려다오 에미야울부짖었을 연기들 그을음들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번민하는문명세계 어느새 내 가슴으로 옮겨온 구멍은더 이상 커지지를 않고조용히 나를 관찰한다귀를 대보면한숨소리숨소리소리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란다 더보기
파업 공지 방금 게시글 수를 봤다가 제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치를 보이길래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전면 파업 혹은 휴업에 돌입합니다. 요구조건은 없습니다. 더보기
유인 미사일(The Manned Missiles) 극도로 단소한 감상이지만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커트 보네거트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없다. 대체 처음에 어디서 이름을 봤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제5도살장을 사놓고 번역이 기묘해서 읽지 않았다. 친형은 그걸 아주 재미있게 읽은 눈치였지만 난 그냥 방치해 둔 채 커트 보네거트를 내 가슴 속에 묻었다. 얼마 전 영어 공부가 하고 싶어서 시시껄렁한 키워드를 검색해보다가, 누군가가 올려둔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발견했다. 단편인데다가 전문이 올라와 있는지라 한번 읽어보기로 했다. 편지글 형식으로 된 소설은 원래 정말 안 좋아하는데도 말이다. 아니 그런데 영어로 써놓으니까 편지글로 쓰는 게 왜인지 더 멋져 보였다. 만약에 이걸 한국어로 옮겨놓는다면 합쇼체를 써야할텐데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아 .. 더보기
릴레이 소설1을 처음으로 이어씀 안경이 예뻤다. 차마 안경을 쓰든 안 쓰든 예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옹졸하게 안경이 예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기껏 청첩장을 보내준 전 여자친구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는 말은 이 나이 먹고 할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운명처럼 만나서 우연에 의해 헤어지곤 한다. 그게 껍데기뿐인 상상에 불과할 지라도 최소한 성현이 정아를 만나기까지는 수도 없이 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정아를 소개해 준 P선배는 정아와 같은 극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데다가 과방에 들어오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성현의 동기들은 그를 많이 어려워했다. 과방에 왔을 때 마침 그가 와서 어색하게 앉아 있으면 뜬금없는 질문을 툭툭 던지고는 몇 마디 나누다가 휙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쿨하다거나 하는.. 더보기
승리의 방식 나는 돌아서 가는 게 좋다. 목적지가 있는 여행은 편리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지에 도달하고, 또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면 처음 출발한 장소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이동하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그저 수단에 불과한 느낌이다. 오히려 목적지에서 느끼는 감상과 그곳에서 겪는 사건들에 심취해 있기 때문에 이동은 보조적인 시간, 심지어 무용한 것으로까지 느껴지곤 한다. 시간을 절약한다는 이유로 야간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이 그러하다. 물론 정지된 숙소에서도 잘 수 있고 기차에서도 잘 수 있다면, 기차를 택하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야간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버려지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건 목적지 중심적인 사고다. 사실 여행에 대해 쓰고 싶지는 .. 더보기
어둠의 뒷편 빛의 뒷편에는 어둠이 있겠지만, 어둠의 뒷편에 빛이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빛에는 모든 색깔이 다 숨어있지만 어둠에는 아무 색깔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둠의 뒷편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일단 아무 것도 없다고 답해야 한다. 어둠에게는 어둠 나름대로의 원리원칙이 있어서, 사람이 어둠의 뒷편을 탐험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한 사람의 생애에 고작해야 한두 번 찾아올 아주 특별한 순간이라면 빛과 어둠의 틈새를 조금 엿보는 게 가능할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가능하다. 시간이 앞에서 뒤로 흐르고, 중력이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때가 오면 어둠의 속살이 희미하게 보인다. 신앙 서사시처럼 거룩한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는 인간의 몫이다. 그 때도 당당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 더보기
불치병 불치병 끝이 시작되는 지점에서더 이상 가망 없는 것들을 사랑한다내가 낳은 통증의 생김새를아낌없이 상상한다 기울어진 석양겁에 질린 동물처럼사다리를 타고 오르면문 속에 문이 있고짓다 만 거미집이 늘어진다 그물의 형상손잡이 없는 찻잔이빙글빙글 기만하고홀수 명의 모임은 언제나공정할 줄을 모른다 테이프가 끊길 때까지감고 감아도 만날 수 없는건너편의 아픔 또 하루를 중얼거린다 (2013.12.20.) 역시 이럴 때는 시를 써야 한다.못 써도 써야한다. 더보기
제목 미정(2) 강남역에 있다고 하길래 기대하고 찾아간 학원의 내부는 놀라울 만큼 허름했다. 석유난로라도 때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의 교실에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나라의 말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이 정도나 된다는 것이 남자는 신기했다. 무엇보다 더 신기한 건 그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곧 그 나라에 파견될 회사원과 어릴 때 그 나라에 잠시 살았지만 다시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고등학생, 여러 언어에 관심이 많다는 아주머니. 전부 그럴 듯한 이유이면서도 왜 하필 그 나라냐는 질문에는 다들 웃어넘길 뿐이었다. 상부의 지시라거나, 어릴 때의 경험, 언어 자체에 대한 흥미는 굳이 그 나라가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자주 그.. 더보기
그렇게 사랑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엔 아니 이런! 생각해보니 그냥 남의 게시판에다가 쓰면 그 사람 이름으로 글이 써지는 거군. 배설은 상당히 위험한 지반에 기초해있다. 하지만 조용히 내 이름 아래에 글을 쓴다. 오래된 연인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사귀어온 상대를 뜻하거나, 기억 한 가운데 조용히 묻혀있는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봤자 한끗 차이 아닌가? 전자하고 헤어져서 몇 해쯤 지나면 후자로 전환되니까. 이런, 시간의 흐름을 너무 가볍게 말해버렸다. 허나 망각은 시작되고 나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오래된 연인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방금은 독일어에 대해 생각해봤다. 몇 해 배우다가 대학 와서는 손도 대지 않던 것을, 이상한 바람이 불어서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게 불과 일 년 전의 일이다. 단어도 얼마 외우지 않고 연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