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배설>/심연 썸네일형 리스트형 카루타로 향하는 좁은 길(2) http://baesul.tistory.com/14 에서 이어짐. 음수 둘. '문과계 스포츠' - 암기력과 순발력, 지구력의 문제 당신이 일본고전문학 덕후라고 가정하자. 백인일수 정도는 이미 옛날에 다 외워버렸고 와카를 직접 쓰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신이 카루타를 한다면 남들보다 수십 배는 유리하겠지만 그렇다고 잘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건 카루타가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다 쓰는 스포츠. 카루타의 형식이나 룰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일단 간략하게 소개해보자면, 5/7/5/7/7의 구조를 지닌 와카는 앞의 5/7/5가 상구, 뒤의 7/7이 하구로 나뉘는데 플레이어들이 갖게 되는 카드는 하구 카드다. 한번에 100개를 다 갖고 하지는 않고, 그.. 더보기 이별의 사유화인가 사회화인가 이별의 사유화인가 사회화인가 심연 아무 것도 모르는 지금보다 더 몰랐던 시절 김연수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건 독후감의 세계에서 평론의 세계로 넘어오고 싶어서 발돋움 하는 아이의 몸놀림이었다. 지금 읽으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논리를 전개하지만, 한 가지 즐거운 건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완전히 틀린 통찰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문학적 방법론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어도 김연수의 작품들을 탐독하며 얻은 인상만으로 써 나간 것 치고는 괜찮았다. 팬심의 힘이라고 해야할까. 그 후로도 김연수의 책을 여러 권 더 읽었고 이전만큼 나를 사로잡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그는 나에게 최고의 작가다. 그래서인지 김연수에 대해 쓰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다. 샅샅이 파헤쳐보기보다는 감탄과 경이의 .. 더보기 쟐롭은 (부)조리하다. 쟐롭은 (부)조리하다. 심연 모국어라는 것은 역시 공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내가 모국어를 훌륭하게 구사하고, 여러 가지 단편적인 요소들로 모국어를 향유한다고 해도 그 공간이 외국어의 공간이라면 끝없는 갈증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한편 외국어의 공간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더라도 모국어를 잊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얼마 전 나는 꿈에서조차 외국어를 사용할 정도로 일순간 모국어로부터 멀어진 느낌을 받았는데, 쟐롭의 글을 다 읽은 것도 아마 그 즈음이 아닌가 싶다. 사실 쟐롭의 글을 읽기로 한지 대체 몇 개월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미루고 미뤄서 기한을 넘기고 넘긴 끝에 모국어가 그리워지자 급기야 쟐롭의 글까지 읽게 된 것이다. 과연 그것이 모국어에 대한 나의 향수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는지 부정.. 더보기 20.09.13 그저 화장실에 가고싶어서, 표지판을 따라 걸었지만 문이 잠긴 장애인용 화장실뿐이었다. 두 칸짜리 계단에 걸터앉은 동양인 여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별로 가망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급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화장실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독일어를 할 줄 모른다고 했고, 나는 떠듬떠듬 영어로 다시 말했다. 독일어에 익숙해진 입에서 가끔씩 영어를 꺼내려면 꽤나 큰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녀는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지만 문이 잠겼다고 했고, 나에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보았다. 독일에서 역사 구석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지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영어가 꽤나 유창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무언가를 질문할 틈도 없이 끊임없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수상.. 더보기 짧은 인삿말 고통스러운 글쓰기에 도전해본다. 고통이 우리의 내부에 존재한다면, 글을 쓰면서 그저 내 안에 있는 고통을 꺼내오면 될 뿐이다. 하지만 고통이 우리의 외부에서 필요할 때마다 방문하는 것이라면 까다로운 주문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나는 오 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지만 여기에 무언가를 쓰고자 한다. 이런 상황이 나에게는 쉽지 않은 요구다. 평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글을 쓸 때는 특히 멍하게 생각을 하며 많이 지체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고통을 제대로 소환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글자수에 제한이 없는 이상 정말로 고통스러운 글쓰기는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지내는 방을 곧 떠나야 할 것이다. 운이 좋아서 테라스가 달려있고, 돌 틈으로 민들레 비슷한 풀들이 자라는 모습을 자리에 앉은 채 구경할 수 있.. 더보기 어떤 이야기(2) //어떤 이야기(1)과 (2)를 수정하였습니다. 바깥에 나와서 빛이 처음으로 만난 입자는, 외로운 성간물질이었다. 빛은 한 번도 외로워 본 적이 없어서 성간물질이 하는 말을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성간물질은 한동안 어떤 별의 일부였다고 했다. 빛의 시간 개념은 상당히 왜곡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한동안이 의미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으나 성간물질의 상태로 보아 꽤나 긴 것임이 분명했다. 그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해 나가기를 포기한 채, 잿빛 표정을 지으며 몹시 외롭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빛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결국 이야기는 성간물질의 고독함에 대한 주장으로 수렴했다. 그것은 무슨 느낌인가. 너무 멀다는 느낌이다. 무엇으로부터 멀다는 느낌인가. 과거로부터 .. 더보기 어떤 이야기(1) ○아아, 모국어가 멸종했다. 무시무시한 적막 속에서 거친 숨을 내쉬던 그것이 한순간 숨을 멈추었다. 세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고요해졌으므로, 소리의 없음이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다. 본래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은 곳에서 결핍감이 느껴질 리가 없다. 이 순간을 조각으로 남긴다면 팔의 단면이 말끔하게 잘려나간 형태의 흉상이 어울린다. 가슴 아래는 이 느껴질 기미도 없이 시원하게 부재한다. 이 이야기는 아주 짧고 간결한 침묵의 시간을 위한 이야기다. 그것이 다시 노래하기 시작할 때, 이야기는 비로소 다시 잠에 들 것이다. ○어두운 한 가운데에 빛이 놓여있다. 동굴 천장에 구멍이 뚫려 생긴 것처럼 동그랗고 환한 모양으로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빛은 탁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 위에서 .. 더보기 강잉(強仍) 강잉 담뱃잎이 담긴 통을 여는 것으로 나의 너저분한 일상이 시작된다. 일상이라면 마땅히 더러울 것이, 그 첫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하기에 아침부터 아주 완벽한 일을 하는 셈이다. 금속으로 된 물건이긴 하지만 호주머니에 넣은 채 걸어다니며 쓸리고 꺼내면서 쓸려서 겉의 아름다운 도색은 전부 벗겨졌다. 어쩌다가 물에 한 번 빠뜨렸는데 제대로 말리지 않고 닫은 덕택에 통을 돌려서 열 때면 괴상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적어도 내게는 음악이다. 안에 들어있는 담배라고 해도, 한 주먹에 10환짜리 싸구려니 이런 통 따위야 거지를 줘도 안 가져갈 것이 분명하다. 흡사 기침병 환자가 약을 삼키고 만족하듯이 나도 허겁지겁 오줌맛 나는 담배를 빤다. 잉여인에게는 이 정도의 생활이 적합하다. 부엌으로 나가면 아내가 손을 씻고 나.. 더보기 카루타로 향하는 좁은 길(1) 0. 쉬운 산수로 시작해야겠다. 양수에 양수를 곱하면 양수가 된다. 양수에 음수를 곱하면 음수가 된다. 여기까지는 조금 상식적인 수준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음수에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된다는 사실은 조금 특별하게 느껴진다. 수학적인 증명이 따로 있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초등학생 수준의 수학으로 이를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곱하기는 그 수를 n번 거듭해서 더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삼 곱하기 사는, 삼을 네 번 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너스 삼에 사를 곱하면, 마이너스 삼을 네 번 더하면 되니 쉽게 해결된다. 마이너스 삼에 마이너스 사를 곱하면 어떨까? 마이너스 삼을 마이너스 사 번 더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여기서 빼기를, 음수를 더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마이너스 삼을 네 .. 더보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