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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심연

카루타로 향하는 좁은 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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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산수로 시작해야겠다. 양수에 양수를 곱하면 양수가 된다. 양수에 음수를 곱하면 음수가 된다. 여기까지는 조금 상식적인 수준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음수에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된다는 사실은 조금 특별하게 느껴진다. 수학적인 증명이 따로 있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초등학생 수준의 수학으로 이를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곱하기는 그 수를 n번 거듭해서 더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삼 곱하기 사는, 삼을 네 번 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너스 삼에 사를 곱하면, 마이너스 삼을 네 번 더하면 되니 쉽게 해결된다. 마이너스 삼에 마이너스 사를 곱하면 어떨까? 마이너스 삼을 마이너스 사 번 더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여기서 빼기를, 음수를 더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마이너스 삼을 네 번 빼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로 답은 십이가 된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설명한 건 전적으로 카루타를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생각하는 카루타는, 음수와 음수를 곱해서 만든 양수같은 존재다. 그것도 엄청난 음수와 또 엄청난 음수가 만나 만들어 낸 엄청난 양수다. 카루타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번 검색해봐도 좋겠지만, 이 글을 따라가다보면 점차 알 수 있을 것이기에 모르면 모르는 대로 편한 마음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음수 하나. 일본 고전문학과 백인일수 카루타


카루타는, 일본 고전문학을 빼놓고는 성립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와카'라는 갈래와 연관되어 있다. '와카'는 아마 처음 들어본 사람들도 꽤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와카에 비해 훨씬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하이쿠에서 시작하자. 5/7/5자의 짧은 형식 속에 여러 의미를 담아낸다고 해서 서양 사람들이 환장하며 열심히 Haiku를 짓게 했던 바로 그 하이쿠말이다. 하이쿠의 기원은 본래 '렌가'에 있다고 하는데, 렌가는 5/7/5/7/7의 운율 구조를 갖고 있으며 한 사람이 5/7/5를 읊으면 이에 7/7자로 받으며 계속 이어지는 시였다. 최근 힙합계에서 Control비트를 가지고 시끄러운 디스전에 벌어지면서 이방원과 정몽주를 디스전의 원조니 뭐니 하는 웹 창작물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우리가 요새 배우는 고전문학의 운문들은 원래 다 노래다. 지금이야 시와 노래가 완전히 떨어져나가서 '시적인 노랫말'운운하기도 하지만 시는 육첩방에 틀어박혀서 쓰는 게 아니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주고받으며 부르는 게 이상할 것 없었고, 일본에서도 그런 식의 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렌가의 운율이 바로 와카의 운율에서 전해진 것이다. 와카에도 여러 형식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와카라고 하면 5/7/5/7/7의 구조를 가진 '단카'를 일컫는다. 정리하자면 와카는 일본의 정형시로 그 운율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카루타는 와카 중에서도 꽤나 유명한 '오구라 백인일수'에 들어가는 와카를 가지고 즐기는 것이다. '백인일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백 명의 시인들의 와카를 각각 하나씩 뽑아서 만든 백 수짜리 시선집이다. 그야 와카는 길지 않으니까 단독적으로 전해지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편찬된 선집의 형태로 전해질 만한데, 백이라는 수가 왠지 의미심장하다. 앞에 붙는 '오구라'는 이 선집이 오구라에 있는 산장을 꾸미기 위한 병풍에 쓰였기 때문이다. '오구라 백인일수'의 구성을 살펴보면, 계절감이 들어간 경우가 많고 또 사랑을 소재로 다룬 노래가 꽤 많다. 그리고 작자들도 천황, 귀족 남녀,승려 등으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팬을 확보하기에 상당히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백이라는 딱 떨어지는 수에, 각각 시가 담고 있는 이야기와 작자들의 생애, 숨막힐 정도로 훌류한 표현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오타쿠가 되어버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는 농담이지만 '오구라 백인일수'는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을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다.


아마도 카루타가 '오구라 백인일수'를 가지고 만들어진 건 그만큼 여러모로 적절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이 모든 적절한 점들은 피하고 싶은 존재가 된다. 우선 일본어다. 아무리 일본어가 한국어와 닮았다고 해도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정말로 가까운 언어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는데다가 한자가 점점 쓰이지 않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일본어는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에게 낯선 언어다. 그나마 일본 대중문화의 파급력 덕분에 일본어에 능숙한 인구가 지금 정도 수준에 머무를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렇지만 일본어에 능숙하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백인일수는 중세 때 편찬되었기 때문에 현대 일본어를 안다고 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현대 일본어에 능숙하다면 대강 의미 정도는 캐치해낼 수 있겠지만, 한동안은 낯선 어휘들에 적응해야한다. 게다가 백인일수는 와카다. 즉, 아무렇게나 써놓은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이므로 상당한 내공이 없으면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서 대단히 재미없는 내용이 되어버린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백인일수 해설서가 여럿 나와있기 때문에 일본어만 할 줄 안다면 고전 일본어나 문학적 의미, 작자가 어떤 사람인지 등등은 알 길이 열려 있다. 하지만 역시 어렵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문학 자체에도 그다지 관심을 갖지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한국 사람이 백인일수에 관심을 가질 확률은 차라리 마이너스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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