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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심연

카루타로 향하는 좁은 길(2)

http://baesul.tistory.com/14 에서 이어짐.


음수 둘. '문과계 스포츠' - 암기력과 순발력, 지구력의 문제


당신이 일본고전문학 덕후라고 가정하자. 백인일수 정도는 이미 옛날에 다 외워버렸고 와카를 직접 쓰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신이 카루타를 한다면 남들보다 수십 배는 유리하겠지만 그렇다고 잘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건 카루타가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다 쓰는 스포츠.


카루타의 형식이나 룰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일단 간략하게 소개해보자면, 5/7/5/7/7의 구조를 지닌 와카는 앞의 5/7/5가 상구, 뒤의 7/7이 하구로 나뉘는데 플레이어들이 갖게 되는 카드는 하구 카드다. 한번에 100개를 다 갖고 하지는 않고, 그 중에 50개를 시합 전에 미리 무작위로 골라놓으면 그걸 상대방과 역시 무작위로 25장씩 나누어 갖는다. 시합이 시작되면 앞에서 낭독자가 통 속에서 무작위로 카드를 한 장씩 꺼내어 상구부터 낭독한다. 상구를 듣고 그에 해당하는 하구를 상대방보다 먼저 잡아내는[쳐내는...] 게 주요목적이다. 다만 50장은 놓여있지 않기 때문에 그에 해당하는 카드를 읽었을 때에는 카드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이 모두 백인일수를 줄줄 암송할 수 있을 때까지 외워야 하나?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상구에서 앞의 몇 글자 정도를 들으면 어떤 시인지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決まり字(우리말로 굳이 번역하면 가름자...)라고 하는데, 키마리지는 한 글자부터 여섯 글자까지 다양하다. 시합을 위해 제일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하구 카드를 보고 그 카드의 키마리지가 무엇인지를 외우는 일이다. 사람에 따라서 걸리는 시간은 각자 다르지만 대체로 열심히 하면 하는 만큼 느는 건 여기서도 당연하다. 그럼 키마리지를 다 외웠다면! 아쉽게도 끝이 아니다. 매번 할 때마다 무슨 카드가 나올지는 알 수 없고, 상대방이 카드를 어떻게 배치할 지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자신은 특정한 카드를 특정한 장소에 놓는 방식으로 암기의 부담을 줄이고 잡는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이것을 自陣(자진...그러니까 자기 진)이라고 부르고 자기 진을 만들고(만드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운다면 카루타 시합을 해도 무리없는 상태가 된다. 그야말로 시합을 '할 수 있다'는 초기 상태.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공을 들여야 하는데, 문제는 매 시합마다 상대방 카드의 위치를 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시합 시작 전 15분간 주어지는 암기 시간도 있지만 시합 내내 계속 외워줘야 하고 카드의 이동에 따라 기억을 바꿀 필요도 있다. 게다가 이전 시합 때의 기억이 머릿 속에 남으면 잘못된 카드를 건드리게 되기도 하니 그야말로 머릿 속이 하얗게 되는 스포츠다.


만일 당신이 여기까지 듣고도 카루타에 관심이 남아있다면, 사실 나머지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눈물 날 만큼 힘든 건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카루타를 잘 하려면 당연히 주의깊게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손도 그에 맞게 빨리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대개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판가름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점점 인간 능력의 극한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실제로 그러하다. 여기에 특히 한국인들에게 힘든 것은 카루타를 할 때 취하는 자세이다. 소위 正座(정좌)라고 불리는 무릎꿇은 자세를 유지하며 시합 내내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은 무릎이나 발목은 물론 허리에도 압박이 된다. 실제로 필자 본인은 카루타를 시작한 뒤로 정강이 쪽 근육에 약간 무리가 생겨서 병원에 갔으나 병원에 간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그러나! 카루타를 하면서 뭔가 몸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한 시합당 한 시간 이상을 보내다보면 정신적 노고와 신체적 불편이 양면에서 공격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본인은 아직 하루에 두 시합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제대로 연습하면 네다섯 시합도 한다고 하니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카루타를 위해서는 준비운동은 물론이고 평소의 꾸준한 런닝이나 기초체력을 다져주는 맨손운동 정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전인적인 유희


너무 겁을 준 것 같지만 카루타를 하는 데에는 그 만큼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어렵고 또 어렵기만 하지만 하나하나 넘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보이고, 우아하고 지적인 동시에 격렬하고 화끈한 스포츠가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머리를 쓰는 게임들은 많지만 그와 동시에 순발력을 요구한다든가 하지는 않으며, 몸을 쓰는 운동들은 많지만 그 와중에 치밀한 암기가 요구되는 것은 없다. 양극단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한 지점으로 모여들어 있으니 조화롭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카루타는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스포츠다. 남자라고 해서 여자보다 유리할 이유가 없고, 나이가 많은 사람도 부담을 되겠지만 다른 스포츠에 비하자면 그다지 밀릴 이유가 없다. 필자는 카루타를 시작하면서, '이건 평생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정말 기뻤다. 조급하게 할 필요도 없으며, 나이 들어서도 즐길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진 스포츠인가. 몸이 불편한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카루타를 할 수 있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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