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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심연

이별의 사유화인가 사회화인가

이별의 사유화인가 사회화인가



심연


아무 것도 모르는 지금보다 더 몰랐던 시절 김연수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건 독후감의 세계에서 평론의 세계로 넘어오고 싶어서 발돋움 하는 아이의 몸놀림이었다. 지금 읽으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논리를 전개하지만, 한 가지 즐거운 건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완전히 틀린 통찰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문학적 방법론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어도 김연수의 작품들을 탐독하며 얻은 인상만으로 써 나간 것 치고는 괜찮았다. 팬심의 힘이라고 해야할까. 그 후로도 김연수의 책을 여러 권 더 읽었고 이전만큼 나를 사로잡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그는 나에게 최고의 작가다. 그래서인지 김연수에 대해 쓰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다. 샅샅이 파헤쳐보기보다는 감탄과 경이의 작가로 남겨두고 싶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김연수에게 갖는 애정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애정이 매우 불공정한 방식으로 작동하여 판단을 망칠 확률이 높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김연수를 다시 꺼낸다. 개인적으로 근래에 많은 이별을 체험하였고, 독일에 가져온 유일한 한국 소설책이 <세계의 끝 여자친구>이며, 김연수만큼 이별을 즐겨 쓰는 작가도 없으니 이는 나를 몰아세우는 삼위일체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수록된 아홉 개의 단편들은 전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김연수의 레퍼토리가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 아니라, 김연수가 얼마나 일관되게 주제의식을 밀고 나가는 타입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형철이 이 책에 쓴 평론에서 김연수 소설의 세 가지 명제에 대해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김연수가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소설을 구성해나간 덕분이다. 김연수의 소설 속에서는 신형철이 쓴 대로 세계는 붕괴하고 삶은 이야기가 되려고 하고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되려고 한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좀 더 시선을 낮추어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다지 이별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다. 길지는 않아도 지금까지의 삶을 한 곳에서 살아냈고, 운 좋게도 많은 사람들과 만나 함께 했으며 기억할 만한 이별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별의 초보로서 얼마 안 되는 이별은 대개 전적으로 혼자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지운다는 기분으로 머리를 짧게 밀어버렸던 적이 있었는가 하면, 어쩔 줄은 모르고 매일 저녁 술을 마시고 잠에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건 내가 이별은 개인의 내면에만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별에 실체를 부여한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겠지만, 그건 말하자면 표상이고 이별의 본질은 이별하는 사람들의 안에 들어 있다. 상실감은 한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던 따뜻한 공유의 기억들이 식어버린 손난로처럼 차갑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별에 관해 이야기해 본들 그 누가 이해할 것인가. 심지어 이별의 당사자들끼리도 각자가 지니고 있는 기억은 다르기에 그다지 소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리 선생이다. (아마도)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마음 속에 품던 그녀를 둔 채 다른 젊은이들과 떠난 뒤로 똑같은 이야기를 수십, 수백 번이고 다시금 새로이 고쳐 적으며 평생을 살아온 리 선생은 이별을 극단적인 형태로 사유하려고 한다. 그는 이야기를 쓰면서 위로받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지만 사실 끝없는 가정들로 과거를 변주하는 그의 이야기는 고인 물과 같다. 그저 자신이 체험했던 이별의 기억을 서사의 형태로 재생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신이 쓰는 것으로 모자라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쓰게 하는 모습은 이별조차 재화로 취급하며 이를 구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리 선생과 같은 절망 속에 갇힌 인물이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전직 형사다. 그 또한 리 선생처럼 죄를 씻고 싶은 마음으로 오랜 세월을 한 가지 일에 몰두한다. 다만 리 선생이 쓴다면, 이 전직 형사는 읽는다. 그리고 리 선생리 선생의 그녀가 최소한 사랑의 형태로 연결되어있었다면 전직 형사와 그가 죽음에 이르게 한 대학생은 증오의 형태로 연결되어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전직 형사가 직면했던 이별은 책을 읽는 것으로 극복되지 못하고 끝내 전직 형사가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택하게 만든다. 이별을 자기 안에 가두고 통제하고자 한 인물들은 자신의 이별에 관해 많은 것(그것이 서사의 형태이건 지식의 형태이건)을 소유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 이별이 사적이지 않다면 공적이란 말인가? 이별에 대한 집단 기억 자체는 공적일 수가 있다. 하지만 이를테면 내가 기억하는 열사 전태일과 전태일의 친구들이 기억하는 전태일, 혹은 이소선 여사가 기억하는 아들이 다르다. 전태일이 공적 인물이라고 해서 그와의 이별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적 이별인 것은 아니다. 역시 이별은 사적인 한계에 갇히고 마는가? 김연수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이별의 사회화를 제안한다. 표제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우리가 제대로 만나볼 수 있는 인물은 두 명 정도지만 온통 이별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여기서는 이별이라는 소재에 걸맞게 끊임없이 변해가는 세계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또 약간의 용기를 엿볼 수 있다. 젊은 가 얼마 전에 겪은 여자 친구와의 이별과 늙은 희선 씨가 수도 없이 경험했고 경험해야 할 이별들이 만나는 건 한 그루의 메타세쿼이아 나무 아래서다. 이것만 가지고는 여러 층위의 이별들이 어울리고 있을 뿐 사회화라는 말을 감히 쓰기가 어렵다. 하지만 희선 씨의 제자였던 한 시인을 매개로, 그가 남기고 간 편지를 전달하러 가는 순간 희선 씨의 이별은 같은 차원으로 수렴한다. 사랑은 유한하지만 이별은 영원하므로, 역설적으로 시인과 그가 좋아했던 여인이 이별했을 때 그들의 사랑은 영원한 것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른바 이별의 두 번째 상()이라고 할까나.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던 <달로 간 코미디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소설가인 주인공과 방송국 프로듀서인 그녀가 권투선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사귀게 되고 9.11테러로 인해 헤어졌다고 해서 사회적인 이별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권투선수의 죽음의 한편에는 그녀의 아버지인 코미디언의 실종이 연결되어 있었고 9.11테러로 인해 그녀가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여기서 이별()을 중재해주고 있는 것은 결국 시각장애인이 보는 세계가 된다. ‘가 해준 에야크어의 마지막 사용자의 침묵과 암흑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시각장애인용 도서관 관장에게 이어지고 비로소 그녀는 아버지의 시력이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미국행은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친 아버지가 아니라, 빛이 보이는 사막을 향해 가버린 아버지와의 이별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돌아와 도서관 관장을 통해 가 환한 달을 보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그녀의 이별의 완성이기도 하다.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시각장애인들이 겪는 기존의 세계로부터의 이별일 것이다. 도서관 관장의 말대로 완전한 어둠 속에 빠지면 내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마는데, 이에 대응하여 코미디언이 빛을 향해 걸어가 실종된 것은 궁극적인 이별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이것이 사회화된 이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인물들이 이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별의 사회화란 김연수가 쓴 대로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에서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여기에는 이별에 대한 소유 대신에 이별의 세계 이편과 저편, 이전과 이후를 넘나드는 교감이 있다. 이미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이것을 불꽃으로 지칭한 바 있으니, 내가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그다지 새로운 점을 밝혀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세상에는 사회적 이별이라는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으면 한다. 나는 항상 사랑을 소유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별도 소유하려고 했을 뿐이고, 이별의 사회화가 놓일 자리는 없었다. 따라서 이별의 사회화를 믿기 전에 우선 사랑에 대한 태도부터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싶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적합한 인간인지 어떤지는 잘 몰라도 김연수의 글을 읽으면 나 같은 인간도 사랑을 하고 열심히 후회하면서 살아간다. 모든 걸 사유화하는 시대에 사랑마저 사유화해버리면 재미가 없으니, 나는 후회 속에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사유화에서 사회화로 기수를 돌리는 힘이 후회에 있다고 하면 세상이 너무 질척한 게 아닌가 싶으나, 손쉽게 오그라들어 숨어버리는 것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이별할 상대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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