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역학적 소네트
다정한 공간은 몰아내도 그만
오년 뒤의 당신을 지금 좋아할래
당신의 육체가 오늘부터 그려갈
노곤한 노화의 궤적을 혼자 따라갈래
오늘이 무너지고 또 무너질
장미색 루주 앞에서
기다림을 모르는 아이처럼
당신의 미래를 예약할래
어딘가에 새겨질 주름의 자리를
불현 듯 나타났다 사라질 상처까지를
터무니없이 선매수해야 할
불합리한 계약을 기꺼이 체결할래
당신을 스쳐갈 부정형의 문장들 속에서
입술은 자줏빛으로 늘어지겠지만
지워지지 않는 젊음을 보증 삼아
곧 다가올 당신의 못생김을 사랑할래
그러니 이젠 내 이름을 잊어도 좋아
엔트로피 법칙을 한 번만 믿어볼래
(2013.11.11)
*시작노트
침낭을 덮은 채 누워있다가 문득 떠올랐다. 내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지금 여기엔 없을 뿐이다. 그렇게 하루 내내 간직하던 심상을 밤이 되어 적어봤다. 엄격한 의미의 소네트는 아니지만 이런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도 한번만 열역학 제2법칙을 믿고 당신을 미리 질러가서 사랑하고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