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것도 노동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기자가 되고 나서 그의 몸은 노련한 미장이의 몸이 특수한 근육을 발달시키듯이 글 쓰는 데 필요한 최적의 형태로 변화해갔다. 뱃살이 나오고 손가락이 가늘어졌다는 등의 소리가 아니라, 글을 쓰기 시작할 때면 우주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한없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퇴근에 정해진 시간은 없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떠날 때 다시 자리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쓰기 시작하는 글은 낮에 쓴 글하고는 판이하게 다른 내용의 글이었다. 어느 때는 수없이 많은 과일의 이름을 나열하다가 끝나기도 했고, 외국어 단어를 가지고 그 소리나 모양만을 잔뜩 서술해놓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무런 방향도 없이 표류하는 글을 쓰면서 그는 낮 동안 손에 쌓인 긴장을 풀었다. 그렇게 몇 년인가를 별 일 없이 보내왔고 세상이 시끄러운 만큼 저녁시간에 쓰는 글의 내용도 점점 두서없어졌다. 그러다 책 한권을 내도 될 분량이 되었을 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조용하지만 가끔씩 마주 편에서 차가 지나가던 길을 달리던 택시가 휙 꺾어서 사뭇 다른 느낌의 길로 접어들었다. 손님, 이게 지름길입니다. 제가 운전 경력이 이십년입니다, 이십년. 허허. 택시 기사의 목소리 끝이 바람 소리에 무너졌다. 이상했다. 한적할 줄 알았던 길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나는 소리로 가득했다. 무얼 기르고 있는지는 몰라도 뭔가 잔뜩 자라고 있는 밭 위로 공기가 사박사박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택시에서 멀리 뻗친 전조등 불빛의 끝자락을 바라봤다. 마치 그 빛의 밖에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고, 비로소 빛을 받고 나서야 길이 생겨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 뭐 볼 게 있습니까? 그의 질문에 택시 기사는 반색하더니, 없는 게 없어요, 호수도 있고 산도 있고…. 그가 한 말이 질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혹은 그가 원하는 대답이 이런 게 아닐 것 같아서 기사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거면 됐습니다. 바다도 있는데 호수하고 산도 있으면 다 있는 거 아닙니까. 기사는 그제야 안면에 씩 웃음을 띄우고 담배를 피워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기사도 딱히 동의를 구하려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상관없다고 말했다. 창문 밖에 대고 재를 털 때마다 담뱃불이 바람에 떠밀려 힘껏 타오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담배가 금방 손가락까지 쪼그라드는 모습을 바라보다 그는 눈을 감았다.
생각해보면 이곳 K시에 와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놀러온 적도 있었고, 아주 어릴 때 가족과 함께 머무른 기억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홍조를 띤 얼음이 가득 찬 물회 그릇을 생각하니 입에 침이 고였다. 기억 속의 K시는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 도착해서, 조금 놀다가 왠지 먼 거리를 걸어 겨우 회를 먹고 귀경해야 했던 이국적인 도시였다. 오죽하면 이번에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성(城)과 같은 도시라고 생각했을까. 허나 어느 순간인가 분명히 국경을 넘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에 감싸였던 것이다. 설국의 주인공이 터널을 지날 때의 감정으로 그도 버스 차창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그 자신의 얼굴밖에 없었다. 왜인지 택시 안에 켜져 있는 내부 조명을 끄자 허공에 떠 있던 그의 아까보다 조금 더 지친 얼굴이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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